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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알려드리는 다양한 컬처프리즘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 전남의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소식과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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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서 문화비평1, 100년을 내다보는 지방정부는 없나!
    100년을 내다볼 수 없을까. 매번 선거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새로운 시장이나 도지사 등 지방정부 대표들은 전임자의 정책을 흐트러버리거나 도시의 비전까지도 바꾸는 일들을 한다. 이 때문에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고 만다.가까운 이웃 일본 요코하마는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만든 도시정책이 수차례 시장과 의회가 바뀌었어도 50여년 동안 골격을 유지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광주는 문화도시를 부르짖으면서도 아시아문화전당 외에는 문화정책이 실종된 상태이고 100년을 내다보는 문화전략은 엄두도 내지 않고 있다.그래서 이 자리에서 한 마디 말하고자 한다. 6.13지방선거는 끝났다. 새로 당선된 이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이제 지방정부의 대표를 맡은 이나 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일을 하게 되는 이들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진정한 공복(公僕)이 되어야 한다. 공복이라 함은 우리 사회의 심부름꾼이다.시장이나 도지사는 물론 의원들까지 모두 공복의 위치에 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선거 전에 표를 얻기 위해 머리를 조아렸던 것처럼 당선 이후에도 계속 머리를 조아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민들에게 군림하지 말라는 뜻이다.지난 선거 때는 인물을 보고 투표하자던 언론의 부추김도 있었으나 이번 선거에는 그 말마저 쑥 들어갔다. 이유가 무엇일까. 촛불혁명으로 당선된 대통령과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등 정치적 분위기가 모든 것을 압도하고 말았다. 결국 인물론을 사라지도록 만든 지방선거가 된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대다수 더불어민주당 후보자들은 본인의 역량으로 당선되지 않았다. 물론 열심히 거리에 서서 머리를 조아렸고 밤낮으로 사람들을 만나 선거명함을 뿌리고 악수를 한 것은 인정한다. 그렇다고 당신을 기억하지 않는다.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후보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두들 ‘문재인팔이’에 성공한 시장이나 군수, 의원들이 있었을 뿐이다. 광주는 이상하리만치 투표할 때마다 유난히 ‘스윙보터’의 역할을 했다. 민주당을 지지했다가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고 다시 민주당을 지지하더니 국민의 당을 지지하고 이번에는 다시 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런 논리로 본다면 이번 지방선거에 압승한 민주당이 다음 국회의원 선거나 대통령 선거 때 다시 압승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공복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가차없이 ‘심판의 칼날’을 휘두르는 스윙보터 지역인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스윙보터가 지나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몰표를 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물보다는 ‘냄비’라는 지적도 많다. 이런 정치적 구조 때문에 지역의 100년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개발이나 정치적 결단이 없다. 돌이켜보라. 광주든 전남이든 대한민국이든 100년을 내다보는 진정한 정책이 하나라도 있는가. 말로는 5천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100년 역사를 만들어가는 정책이 단 하나도 없는 이유가 이합집산의 정당구조도 한 원인이 될 것이다.이용섭 당선인은 12조원 들어가는 경제자유구역 공약으로 일자리 창출을 말하고 있다. 찬반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만큼 일자리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차라리 그 예산의 10분의 1만 광주의 100년 대역사를 내다보는 전략을 만들고 투입하기 시작한다면 그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문화의 관점에서 들여다본다면 문화도시를 말로만 부르짖지 말고 과감한 예산투입과 함께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전략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하나 예를 들면 지역의 옛 문헌, 인물에 대한 집중 연구를 통해 선조의 지혜를 오늘에 살려내는 것이다.그것이 지역의 원천콘텐츠이고 문화자원이며 관광요소로서 관람객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는 광주만의 차별화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중요한 것은 광주라는 도시의 100년을 내다보는 비전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여기에 맞춰 모든 용역이 이루어지며 정책이 입안되는 풍토가 행정 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4년마다 치르는 선거 구조 때문에 후임 당선자가 전임의 정책을 깡그리 ‘짓밟는’ 풍토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 그렇더라도 새 시장에게 기대를 해본다. 양식 있는 시장이길 기대하는 것이다./정인서 서구문화원장
    2018-06-21 | NO.7
  • 정인서, 도서·공연 지출비 소득공제, 문화단체 정기후원금도 포함하길
    문화도시 광주의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혜택도 받는 길이 열려 반갑다. 오는 7월1일부터 시행되는 ‘도서·공연비 소득공제’ 제도 때문이다. 필자는 평소 주위 사람들에게 “지금 자신이 벌고 있는 소득은 자신만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가 그동안 지원해준 공동의 결과이다”라면서 자기 소득의 10%는 사회를 위해 쓰되 그 중 절반은 문화도시답게 문화에 썼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지역문화를 살찌우는 길은 지역문화를 시민이 관람하는 데서 출발한다. 크고 작은 전시와 공연, 수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므로 이를 관람하거나 사는 데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바쁜 직장생활 속의 스트레스를 푸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문화관람은 정신적인 힐링을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이번 도서·공연비 소득공제 제도는 10년이 넘은 문화예술계 숙원이 이뤄진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서 구입비와 공연 관람비를 소득공제 대상에 포함하는 '도서·공연비 소득공제' 제도를 오는 7월 1일 시행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도서·공연비 소득공제는 문재인 정부가 국민 문화 향유 확대를 위해 공약한 대표 문화정책 중 하나다. 이 제도는 조세특례제한법 제126조의2 일부개정을 통해 마련됐다. 카드사의 준비기간 등을 고려해 2018년 7월1일 지출분부터 추가로 최대 100만원의 소득공제 한도를 인정받고 소득공제율은 최대 30%로 적용될 예정이다. 도서구입비는 종이책만이 아니라 전자책까지, 온오프라인 서점 구분 없이 공제를 받을 수 있다. 공연은 무용·연극·국악 등 순수공연예술뿐만 아니라 뮤지컬·콘서트·오페라 등도 소득공제 대상이 된다. 다만 출연자가 무대 등에서 실제로 연기를 하는 공연만 해당된다. 영화나 방송 같은 녹화 영상 시청료는 소득공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이번 조치는 생활 속에서의 문화예술 향유 기회를 넓히고 문화예술산업 활성화에도 당연히 기여할 것이라 믿는다. 대상은 연간 총급여 7,000만원 이하 근로소득자며 신용카드, 직불카드, 현금 등의 사용액이 총급여의 25%를 넘는 경우 초과분에 대해 혜택을 볼 수 있다.현재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의 소득공제 한도가 300만원이고 사용액 공제율이 15%인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도서·공연비 명목의 공제한도가 100만원 추가되고 공제율은 15%포인트 더 높아지는 셈이다.신용카드 등의 사용액이 많아 관련 공제금액이 300만원을 초과하거나, 연간 소득이 4,600만원을 웃돌아 24% 소득세율을 적용받는 경우는 세금환급액이 더 커진다. 신용카드, 직불카드, 현금은 물론 상품권으로 구입하는 경우에도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카드 마일리지(포인트)나 휴대전화 소액결제는 해당 사항이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문체부는 “이번 도서구입비·공연관람비 소득공제는 국민이 ‘문화기본법’에 명시돼 있는 ‘기본권으로서의 문화적 권리’를 일상에서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첫 걸음”이며 “앞으로 문화의 사각지대 없이 모든 국민이 문화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그래서 문체부가 이번 도서.공연비 소득공제 제도에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소액 정기후원금도 소득공제를 포함하는 내용을 제안한다. 예를 들면 월 5만원 범위 내에서 매월 정기적으로 CMS나 계좌이체 방식으로 정기후원을 한다면 시민 1인당 연간 최대 60만원 범위내에서 문화예술단체를 직접 후원해줄 수 있다. 정부가 문화예술단체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받는 문화예술단체는 많지 않다. 비록 역량이 부족한 문화예술단체일지라도 성장 육성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시민참여형의 후원을 통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다고 믿는다.또한 시민은 자신이 원하는 문화예술단체에 대한 애정을 더 가질 수 있고 문화예술단체는 공연과 전시 둥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문화향유의 프로그램을 더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인서 광주서구문화원장
    2018-06-19 | NO.6
  • 문틈, 산세비에리아 살리기
    작년에 하도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기에 화분 몇 그루를 구해 집안에 들여 놓았다. 벵골 고무나무, 산세비에리아, 등등. 이것들이 미세먼지를 정화시켜 준다는 신문기사들을 보고서다. 그런데 식물마다 다 식생이 다르다. 산세비에리아 같은 경우는 한 달에 한 번 물을 조금 주어야 한다고 화원 주인이 말했다. 내 생각에 작은 화분에 심겨 있는 제법 키 큰 잎새들이 어떻게 물을 거의 먹지 않고 지낸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노지라면 몰라도 이슬도 먹을 수 없는 집안에 있는 화분에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라고? 그것도 아주 조금만?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다른 나무들처럼 화분의 흙이 말라 있다 싶으면 물을 주었다. 화분을 들여온 지 서너 달이 되었을까. 화분에 가득 나 있던 산세비에리아 잎새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왜 죽어가는지를 도통 몰랐다. 마트에 가서 거름을 사다 뿌려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산세비에리아 잎새들은 잎새 끄트머리에서부터 죽기 시작해 아래로 죽음의 그림자가 뻗쳐 내려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종당에는 잎새들이 다 죽어버리고 마지막 한 잎만 남았다. 이것마저도 위에서부터 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참담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마치 무슨 불운한 징조를 보는 듯한 느낌. 그래서 마지막 잎에서 죽어간 부분을 도려내고 뒤늦게 산세비에리아 살리기 전투로 들어갔다. 물론 물도 안 주고 화분의 굳은 흙을 쿡 쿡 쑤셔서 공기도 좀 들어가게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수를 다 기울였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산세비에리아 잎은 마지막 엄지손가락 크기의 잎새만이 푸른 기운을 쬐금 간직한 채 다 죽은 모습으로 있었다. 저 푸른 부분마저 죽어버리면 다 끝나는구나.아내는 산세비에리아 전체 포기가 다 죽어버렸는데 그깐 쬐끔 남은 잎새로 어떻게 되살아나겠느냐며 새로 산세비에리아 화분을 사라고 종용했다. 안될 말이다. 나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산세비에리아 살리기가 내게 주어진 일상의 임무인 것처럼 총력을 기울였다. 되살리기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런데도 산세비에리아 잎새는 조금씩 죽어 내려갔다. 나는 또 죽은 부분을 잘라내고 희미하게 남아 있는 푸른 기운에 기대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화분의 흙을 조금씩 뒤집어주는 것뿐이었다.이건 순전히 내 억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화분 하나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 불운을 불러오겠는가. 나는 용단을 내려서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남아 있는 산세비에리아 잎을 살짝 들어내서 뿌리를 보고 싶었다. 뿌리가 죽었다면 그냥 버릴 생각으로. 그랬더니 뿌리가 흙을 움켜쥐고는 잘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나는 얼른 도로 풀뿌리를 눌러 흙을 다독이고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뿌리가 완강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죽었다면 뿌리가 쉽게 공중으로 딸려 나왔을 것이다. 물을 뱁새 눈물만큼 뿌려주고 계속 화분을 지켜보았다. 그러고 6월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가기를 멈춘 산세비에리아 마지막 잎새 바로 옆에서 아주 희미한 바늘 촉 같은 점이 새로 보였다. 대체 저것이 무엇일까. 흙이 솟아난 것은 아니다. 돋보기를 비추고 보니 그것은 실낱 같은 산세비에리아 잎의 새 움이었다. 처음으로 가느다란 희망의 촉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는 기분으로 생명의 신비를 새삼 느꼈다. 그 이튿날 외국에 사는 아들이 몇 년만에 귀국했다. 산세비에리아 잎의 새끼 친 촉의 나타남과 아들의 귀국을 이어놓고 보니 좋은 징조로 느껴졌다. 아들 내외가 내 집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산세비에리아 새끼촉은 조금씩 잎새 특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눈에 띄게 커가고 있었다. 잎새 가장자리로는 노란색의 테를 두르고 안으로는 짙은 녹색 바탕을 한 새끼 잎새가 마치 깔때기 모양으로 자라나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새로 자라나기 시작한 새끼 잎 옆에 또 하나의 촉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아들에게 “너희가 와서 죽어가던 화초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말해놓고 보니 정말 그랬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가람 이병기 시인은 난초를 기르면서 ‘환희의 별유세계(別有世界)에 들어 무아무상(無我無想)의 경지’를 보았다고 했다. 난초는 나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기르기 어렵다. 가람 시인의 말대로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고 한다. 나는 그런 정신의 교감을 하는 식물이 아니라 미세먼지를 정화하기 위한 기능성 식물을 기르는데도 끙끙거린다. 어쨌거나 산세비에리아가 화분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꽃을 피워 향을 퍼뜨리는 꿈을 나는 계속 밀고 가련다.
    2018-06-06 | NO.5
  • 문틈, 숲에 이는 바람
    표현을 해보려도 도저히 하지 못할 풍경이다.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 아무리 적절한 문장을 써보려 애쓰지만 냉큼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나무숲이 흔들리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다. 대체 저 숲의 나무 우듬지들, 가지들, 잎들이 바람에 일제히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면을 혀 짧은 언어로 어찌 오롯이 새겨낼 수 있으랴. 숲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런 문장으로는 도저히 그 풍경에 가 닿지 못한다. 무슨 안 보이는 거대한 손이 있어 숲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 숲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람이 흔드는 대로 움직인다. 마치 청보리밭이 바람에 일제히 흔들리는 것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압도적인 흔들림, 흔들림. 그것은 살아 있다는 것. 더불어 숲 전체가 한 몸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 바람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 그런 느낌들이 휘몰아와 내 감정에 소용돌이친다. 내가 저 숲의 한 나무 같다는 감정이입 상태로 된다.그 많던 숲의 새들은 숲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자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피해간 모양이다. 나무가 없으면 못살 것처럼 나무와 친하게 지내던 새들이 뱌람이 불면 죄다 떠난다. 숲을 거처 삼아 지내던 온갖 새들이 거센 바람이 불자 종적을 감추어버린 것이다. 참 무정한지고! 새를 잃은 나무숲이 바람이 몰아치는 대로 마구 흔들린다. 어찌 보면 숲에 바람이 이는 순간 숲은 거대한 외로움 속에서 자맥질하는 듯한 모습이다.바라보고 있자니 우듬지 쪽은 큰 파도처럼 더 크게 요동을 친다. 우듬지 아래 나뭇가지들은 작게 흔들리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흔들림이 더 작아진다. 더 아래 기둥 부분은 거의 흔들림이 없다. 이제야 무엇이 보인다. 나무숲의 흔들림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무들은 위로 뻗어 나간 나뭇가지들이 바람이 불 적에 이리저리 흔들리도록 가늘고 유연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 벌여놓은 사업이란 것이 이렇다. 숲에 이는 바람을 통해서 대자연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과 저것, 모든 것에 대한 적응, 조화, 협력, 방어, 유익을 향하여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새들이 나무숲을 도망간 것은 아닐 것이다. 바람 속에 나무를 두고 새가 떠난 것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려고 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모르지만 바람과 나무와 새는 그것들이 서로 어떤 알음알이로 되어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가령 바람도 사방팔방에서 불고 계절 따라 달리 불어 그 오는 곳과 가는 곳을 가늠할 수가 없지만 나무나 새들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거다. 예를 들면 북풍은 찬 기운을 몰아오고. 남풍은 잔잔하고 부드럽고. 동풍은 건조하고. 서풍은 대개 비를 몰아온다. 이 정도를 사람이 알진대 나무들, 새들이야 서로 한통속인데 모르겠는가싶다. 새들은 다가오는 여름에 바람이 얼마나 거셀지 미리 알아 둥지를 맞춤형으로 짓는다고 하니 그런 것쯤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성서에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바람의 행로를 지적한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바람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비유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흡사 바람의 행로 같다. 바람의 움직임은 보이는데 정작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숲이 흔들려서 바람을 보여준다. 바람은 부는 것 같았는데 사라지고 보이지도 않고 언제 바람이 불었느냐는 식이다. 바람에 생을 견주어 보면 들어맞는 일이 많다. 정처 없이 건듯 부는 것이 바람이니 누군들 바람의 진로를 알겠는가. 숲은 다만 바람이 불면 그만큼 흔들릴 따름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풍경을 보면서 나는 신발 끈을 다시 맨다. 폴 발레리가 노래한 대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서다. 바람에 숲이 흔들리는 모습만큼 생의 충동을 격하게 느끼게 하는 것도 드물지 싶다. 뭐랄까, 삶에 대한 비관과 무기력함에 시달리는 일상에서 숲 전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은 존재감을 극대화시킨다. 살아 있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것을 웅장하게 보여준다. 비단 숲에 이는 바람뿐이 아닐 것이다. 자연에서 나는 수많은 격한 장면들을 목도한다. 가없는 바다에서 물결쳐오는 수수만만의 파도를 볼 때 그렇듯이 숲이 흔들리는 모습은 내게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제 계절은 꽃철이 다하고 잎철로 가는 중이다. 여름에는 더 자주 숲이 흔들리는 풍경을 보게 될 것이다. 흔들리는 숲이 결국 제 모습으로 돌아오듯이 그때마다 나도 또한 본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 부는 숲에서 새들이 잠시 떠났다고 해서 탓할 까닭이 없다.
    2018-05-31 | NO.4
  • 전홍준, 병을 고칠까? 삶을 고칠까?
    오늘 이야기는 보통 의사들의 상식적인 이야기와는 많이 다르다. 동료 의사들이 저를 이상한 의사라고 말한다. 저는 외과의사인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약이나 수술보다는 생채식이나 절식을 이야기한다. 병이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고 말을 한다. 그것은 수많은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저는 의학사와 의학의 철학을 관심있게 공부했고 대학에서도 그것을 주로 가르쳤다. 병을 치료하는 데는 단일이론이 없다. 즉 산을 오르는 데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개의 길이 있는 것처럼 마찬가지이다. 같은 질병도 다양한 관점으로 병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옛 선인들, 히포크라테스는 삶의 방식을 자연의 질서에 맞추면 모든 병이 쉽게 낫는다고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의사인 파라켈수스는 “의술은 자연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의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사들은 열린 마음으로 자연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오늘날에도 의사나 환자들이 깊게 생각해야 할 명제이다. 21세기의 오늘에 16세기의 파라켈수스를 배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피를 깨끗하게 하라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 무엇을 못하면 죽게 되는가? 숨쉬기, 곧 호흡이다. 숨을 못 쉬면 죽는다. 숨쉬기가 생명 유지의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필요한 일은 음식물의 섭취이다. 그리고 운동과 일, 마음, 관계 등 다섯가지이다.의학은 이러한 다섯가지 요소를 잘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면 아프고 잘하면 건강해진다. 오늘은 먹는 음식과 마음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오늘날 모든 병의 최초가 장에서 생긴다고 동서의학에서 말한다.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인들 사이에 각기병, 비타민C 부족으로 인해 발생하는 병이 많았다. 육군에는 이 환자가 많은 데 해군에는 거의 없었다. 육군은 흰쌀밥과 반찬을 먹지만 해군은 현미밥과 채소를 위주로 했다. 왜 그럴까?건강한 창자는 융모라고 해서 인터페론 등 우리 몸의 방어체제를 구축해놓았다. 이곳을 지나가는 나쁜 독소들을 차단한다. 나쁜 식사와 나쁜 생활습관, 즉 밀가루, 흰설탕, 정제염, 저온살균 유제품 등은 음식으로 볼 수 없다. 동물성 음식, 화학류 음식, 중금속 오염 등이 장내 유해균의 증식을 불러와 장누수증후군을 일으킨다.건강한 장의 융모는 유익균으로 뒤덮여 있어서 잘 분해된 영양소만을 흡수하여 각종 면역물질과 3천여 종의 효소를 만들어낸다. 피가 맑으면 절대로 병이 생기지 않는다. 피가 오염되면 고혈압, 당뇨 등 수많은 병이 생긴다. 약을 먹으면 일시적인 치료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고혈압, 당뇨가 병이 아니라 피가 오염되어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피를 깨끗하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지금 한국에는 고혈압 환자가 약 1천만 명, 고지혈증 환자가 700만 명, 당뇨 500만 명, 수백만 명의 비만환자가 있고 지난 4년 사이에 암환자가 60%나 증가하고 있다. 고혈압이 높은 것만이 병이 아니라 선행원인이 있다. 삶의 방식, 스트레스와 삶의 방식에서 문제가 존재한다. 비우고 낮추라문명이 병을 만드는 데 병을 나으려면 가능한 탈문명적으로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음식을 먹는 방식과 잠을 자고 휴식하는 방식, 마음을 쓰는 방식이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이야기이다.우리 한국인 성인은 3명 중 1명이 암에 걸리고 4명 중 한 명이 사망한다. 암은 우리 시대의 역병이다. 병은 그 시대 문명의 반영이다. 19세기에는 결핵 때문에 죽었는데 지금은 암 때문에 죽는다. 그래서 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한다.그런데 암이 병이 아니라고 말한다. 암의 선행원인 때문이다. 무리하게 살지 않고 산소가 잘 흐르는 정상세포가 있다면 암이 걸리지 않는다. 세포는 새롭게 태어나고 성장하다가 죽어서 떨어져 나간다. 위나 창자의 점막 세포는 일주일마다 교체되고 간이나 폐는 3개월마다 교체되며 뇌세포는 10개월 정도 산다. 암의 스위치를 끄기 위해서는 암이 살 수 없는 체내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 무심코 먹는 음식이 큰 문제가 많다. 동물성 고기는 가능한 적게 먹는 것이 좋다. 다만 음식은 사골국이나 도가니탕의 젤라틴 같은 게 장누수증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값싼 오일을 사용하지 말고 코코넛오일이나 기버터를 이용하기 바란다. 한 달 정도 생야채즙이나 과일로 하루 세 번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웬만한 병은 기본 치료가 된다. 흰쌀밥은 설탕을 먹는 것과 같다. 현미 등 생곡식가루를 식사 전에 두 숟갈씩 들거나 야채를 많이 먹는 게 좋다.대표적인 음식치료는 장을 비우고 음식의 양을 낮추도록 한다. 맛있는 음식을 과식하여 창자를 가득 채우는 것이 피를 오염시키는 원인이다. 창자를 비우고 음식의 양을 낮추는 것이 피를 맑게 하는 비결이다. 피를 맑게 하려면 소식을 하면 된다. 생채식이나 곡채식 위주의 소식을 하게 되면 창자 내의 미생물이 우리 몸에 엄청난 면역력을 증강시킨다.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다음으로 마음치료가 필요하다. 욕망을 비우고 노력의 강도를 낮추는 것이다.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생각들로 꽉 차 있는 상태를 스트레스라고 한다. 이런 스트레스가 피의 오염과 건강이 나빠지는 주요 원인이다. 피와 마음도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잘 흐르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의 세계를 영화관의 활동사진과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다. ‘나’에게서 일어나는 생각들의 집합인 마음(mind)이 필름이고, 내 몸(body)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 스크린에 나타난 활동사진이다. 필름 뒤에서 비추고 있는 조명등 불빛은 어떠한 생각도, ‘나’라는 생각까지도 없는 순수한 의식인데 이것이 영(spirit)이고 신성(divine)이며 생명의 근원이다내 마음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가가 내 몸이 경험하는 현실을 결정한다. 불쾌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불쾌한 현실을 경험할 것이고, 유쾌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 유쾌한 현실을 경험할 것이다. 자기 마음이 믿는 대로 자기의 현실에 나타난다. 내가 무엇을 구하고 원한다면 내가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으면 된다. 세계적인 수영선수 펠프스가 왕따에서 벗어나고 신기록을 기록하는 선수가 되었던 것도 이런 마음의 치료를 스스로 한 결과이다.만일 어떤 환자가 낫기를 원한다면 ‘아프지만 나는 이미 다 나았다“고 믿고 다 나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면 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바가 이미 다 이루어 졌다고 확실히 믿기만 하면 된다.
    2018-05-29 | NO.3
  • 문틈, 공으로 듣는 새소리
    홀로 숲길을 걷는다. 녹음이 우거진 푸른 숲길은 마치 나무그늘로 된 터널 같다. 멀리서 가까이서 온갖 새소리들이 들린다. 산꿩의 울음소리, 나무등걸을 쪼아대는 딱따구리 소리, 그리고 가슴 아련한 뻐꾹새 울음소리. 이 산 저 산에서 뽐내듯 새소리들이 다투어 소리한다. 이 화창한 봄날에 새들이 제가끔 독특한 소리로 울어대는 것은 딱 한 가지 목적이 있다. 구애(求愛), 애타게 짝을 찾는 소리다. 알을 낳아 어서 자손을 낳자는 것이다. 숲의 새들만 구애로 바쁜 것이 아니다. 자세히 바라보면 피어난 모든 꽃들도 또한 마찬가지다. 꽃들은 저마다 꿀과 향기를 마련하고 벌과 나비들을 부르거나 솔처럼 송화가루를 날려 역시 자손 번식 길에 나선다. 화려한 색깔, 아리따운 차림, 달콤한 향기. 이것들은 오직 그 목적을 향한 차림새들이다. 새들이 노래하는 것은 인간의 귀 즐거우라고 한 가락 뽑는 것이 아니라 짝을 유혹하는 소리다. 봄은 자손 번식의 질서를 위해 새들과 꽃들, 짐승들이 신방을 마련하는 계절이다. 모든 동식물들이 그러하다. 자연은 들여다볼수록 후대의 번성에 존재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 그것 말고도 새들과 나무들, 풀들이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확실하며 흔들림이 없다.사람은 봄이 벌이고 있는 이런 신방 꾸미기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엄연한 사실을 놓고 볼 때 전혀 무관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들, 동물들, 나무들, 풀들이 봄 잔치를 한 결과로 나온 부산물을 인간이 취하기 때문이다. 자칫 이 대목에서 자연의 이런 자손 번식은 결국 인간을 위한 것으로 오해할까 싶다.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자연은 인간이라는 종이 없다고 해도 자연은 잘 굴러갈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 이 자연에 초대받은 손님 같다.자연의 질서랄까 이치랄까, 이것은 한 마디로 자손을 번식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말한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자연이 요구하는 명령이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 성장하고 자손을 남기고 죽는다. 이 대목에서 잠시, 생각해본다. 인간이란 종이 우리가 미물이라고 부르는 새들과 짐승들과 나무들과 꽃들과 그것들보다 특별히 존엄한가.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이 모든 생명이 함께 자연에서 살 권리가 있으며,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깨달음이 들어선다. 자연이 어떤 생명을 열등한 존재, 업신여김 받는 존재로 세상에 내어 놓았다고 믿기 어렵다. 인간이라고 해서 그것들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저 낭랑한 소리를 짖어대는 새들과 화려한 꽃들과 다른 유일한 차이는 지능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저것들도 나름대로 의식하고 생각하고 말을 한다고 본다. 여기서 그 까닭을 논할 겨를은 없지만 그들 나름대로 생명체로서 완벽한 존재다. 게다가 그들은 대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굴리는 네트워크에 기여하고 있다. 어느 것 한 가지도 없어져서 좋은 것은 없다. 한 포기 풀이 필요 없다면 만상이 다 필요 없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의 모든 생명들이 존귀한 것들이다.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들이다. 봄은 자비심을 가지고 겨우내 새날을 기다려온 싹들을 밀어 올린다. 따스한 햇볕이 그 잎들을 어루만진다. 하늘은 비를 뿌려 목이 마른 뿌리들을 적셔준다. 잎들이 초록으로 세상을 덮으면 동물들은 잎들을 뜯어먹는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초록 세상은 일파만파로 짐승과 새와 인간으로까지 이어지는 그물 같은 먹이사슬을 구성한다. 천지가 협력하여 진행하는 이 대공사에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아니, 인간은 자주 대공사에 훼방을 놓거나 해를 끼친다. 만일,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에서 없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철학자들은 그렇다면 우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건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보았을 때 그런 사고실험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우주적인 관점에서 지구를 본다면 오히려 지구의 본 모습을 회복할 것이다. 인간 없는 자연 천국이 될 것이다.초록이 무성한 봄날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내가 자연의 한 구성원임을 깨닫는다. 눈에 보이는 만상의 위에서가 아니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존재로서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자연에서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김상영의 시 중에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라는 싯귀는 하늘과 땅이 내는 모든 생명과 인간이 하나라는 것을 노래한다. 새들아, 나무들아, 풀들아!
    2018-05-27 | NO.2
  • 문틈, 이 달콤한 고독
    대체로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을 못 견뎌한다. 불안하거나 두려운 까닭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턴가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더 강조되면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는 시대가 되다보니 더욱 그러한 것 같다.홀로 있을 때에도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홀로 있음을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은 무리에서 이탈하는 것보다는 무리에 섞여 있어야 안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 발견이나 자기 탐색은 홀로 있을 때 가능하다. 모처럼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지?’ 하고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부처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도 홀로 수행한 끝에 이루어낸 것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제자들을 물리치고 피땀 흘리며 기도를 한 것도 홀로였다. 뉴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왜 사과는 떨어지는데 하늘의 달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질문 끝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 역시 홀로 있는 시간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쳐버렸을지 모른다.대저 위대한 선각자나 과학자, 예술가들은 혼자서 고군분투 끝에 역사의 별이 되어 빛을 비췄다. 우리 같은 장삼이사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자기를 성찰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동창회다, 야유회다, 사우회다 이런 저런 모임에 갔다 오면 왠지 개운한 기분이 안든다. 괜히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왔다싶은 일말의 공허감이 들 때가 많다. 그냥 무익한 시간을 보내고 온 듯한 기분조차 드는 것이다.하기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하는 일이란 것이 매사에 특별한 의미를 두거나 진지한 시간을 갖는 일이 되기는 어렵다. 사람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그 뒤 끝에 오는 쓸쓸함, 덧없음에 마음이 산란하다가도 또 약속을 하고 나가서 일정량의 수다를 떨고 온다. 그것이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는 실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되도록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하는 편이다. 나와 노는 시간을 귀하게 생각해서다. 그 시간에 나는 위대한 발명이나 깊은 깨달음을 얻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노라면 내 자신의 중심을 붙잡을 수 있다.세상살이에 어룽진 마음을 구두를 닦듯이 닦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인류에게 빛을 남긴 위대한 분들의 책을 읽고, 베토벤이나 바흐의 음악을 듣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나에게는 이 시간이 더없는 보람을 찾는 시간처럼 느껴진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리 생활을 버리고 홀로 지내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듯이 인간은 남과 어울려 살지 않으면 안 된다. 흩어진 모래알처럼 각자 따로 떨어져 산다면 사회라는 공동체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사회(社會)라는 말 자체가 뜻하듯이 모여지내는 틀 속에 살게끔 되어 있다. 흩어진 모래알조차도 가깝게 들여다보면 모래끼리 겯고 있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고 잎이 떨어져 낙엽끼리 모여 구르듯이 삼라만상은 그들 나름대로 무리를 지어 있다. 신기할 정도로 다들 그렇게 모여 존재한다.부처가 깨달음 끝에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친 것은 진리를 깨친 드높은 경지를 말한 것이지 결코 홀로 지냄을 최고로 선언한 것이 아니다.혼자 있는 시간은 사람이 무리 생활을 하는 존재이기에 필요하다. 역설로 들리지만 만일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존재라면 그 혼자 있는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때로 번다한 업무와 관계로 얽힌 공동체 생활에서 이탈하여 저 혼자서 우주와 나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자주 자기를 잃어버리기 쉬운 생활에서 자기(중심)를 찾는 자기 구원의 시간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무리 생활은 말하자면 삶의 현장이다. 그 속에서 지지고 볶고 부딪치고 넘어지며 살다가 문득 홀로로 돌아와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리 생활은 홀로 있는 시간을 의미 있게 해준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 잃어버리기 쉬운 자신의 모습을 찾는 행위는 홀로 있는 시간, 즉 고독한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대체 자기를 잃고 살아가는 생활에 파묻혀 지낸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일생을 그렇게 보낸다면 삶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부처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때로는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망에서 몇 걸음 물러나 자기 자신 속에 침잠하는 시간이 내게는 달콤한 자기 구원처럼 여겨진다.
    2018-05-25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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