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 풍암제길 117 (금곡동)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했던 집의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1571~1621)가 지은 정자이다. 풍암정은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동쪽 20리에 있다.‘풍암’이라는 이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20리에 있다. 지금의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광산구 광곡길 77 (광산동) 칠송정은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 (1551~1616)의 작은 정자이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
북구 충효동 397-3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 거리인 충효리 뒷산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1845~1922) 등이 세웠다.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다. 대부
광산구 원임곡길 46 (임곡동) 광산구 임곡동 원임곡마을의 죽산박씨 대종가 뒷산에 있다. 죽림 박경의 후손인 박동춘朴東春이 1926년 그의 집 뒷산 죽림골에 죽림정을 세웠다. 여러 해 동안 풍수해 등으로 정자가 무너져 후손들이 1969년에 임곡동 원임곡마을 죽산박씨 종가집 뒷산으로 다시 이건했다. 임곡에서 임
북구 우치로 236 (오치동)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다. 하서 김인후가 정자 이름을 지었다는 점에서 1570년대 무렵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때 김천일 장군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과 대적하다 순절한 승사랑 읍취 이방필(李邦弼, ?~1592)의 후손이 세웠다. 그 후손이 이양원(1526~1592)으로 호는
주의 서쪽 4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40리에 있는 건물로 참봉을 지낸 서암 유상근이 건립했다. 후암後菴 송증헌宋曾憲(1878~1947)이 기문을 썼고 주인 유상근의 원운과 유병우柳秉禹의 차운, 면암 최익현의 아들인 월성 최영조崔永祚(1859~1927)의 시가 남아 있다.송증헌의 기문에는 그의 선조는 호가정
광산구 신창동 풍영정(風詠亭)의 주인 칠계 김언거의 손자 김치원金致謜(1562~?)은 수진당을 경영하며 풍영정도 관리했다. 김치원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 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이곳에서는 임련林堜, 장운익
북구 운암동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고 쇄소당 이운홍(李運鴻, ? ~1598)이 지어 지냈다. 이운홍의 호는 쇄소당이다. 기대승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임진왜란 때 함재 기효증, 간재 이덕홍 등과 함께 의곡과 의병을 모았다. 정유재란 때 부친인 참의 이의중을 등에 업고 피난하다 왜적에
서구 서창동 (벽진마을)벽진碧津은 고려 때 벽진부곡이 있었으며 바닷물이 들어왔고 나루터로 운영된 곳이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국립호텔격인 극락원極樂院이 있었던 일대는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벽진碧津이라 했다. 벽진마을은 300여년전 박학순이 광주에서 농경지를 찾아 이곳에 옮겨와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회재 박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 나주 다시 출신 이종우李從愚(1485∼1533)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낙향하여 어등산魚等山 아래에서 지냈던 곳이다. 당시에는 일대가 나주목이었다. 본관은 함평, 자는 예수(睿叟)이다. 부친은 현감을 지낸 이근종李根宗이다. 모재慕齋 김정국金正國(1478~154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우리나
광산구 첨단1동 (미산마을) 광산구 오룡동 미산마을 뒷산 정마봉停馬峰 아래 영산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임진왜란 이전 15세기 무렵에 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 등을 지낸 남강노어南江老漁 이몽린李夢麟이 지었던 정자가 있었다.정마봉은 모악(暮嶽) 권율(權慄 1537 ~ 1599)장군이 전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
남구 양과동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난계 박종정朴宗挺(1555~1597)이 1576년 식년시에 진사 2등 21위로 합격했다. 뜻을 더해 송광사에서 열심히 공부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돌아와 난계蘭溪라는 초당을 지었다. 당쟁에 가담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살다 떠난 곳
남구 구소동 (지석천)송암松巖 최응룡崔應龍(1537~1592)의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자는사서士瑞, 별호는 충절忠節이다.통덕랑 강정 최경립의 아들로 남평 출신이다. 형조참판에 올랐지만 온갖 사화로 세상이 어지러워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지석천 강변 소나무숲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며 책을 읽고 자연을 즐기며
광산구 원사호길 55-43용진산聳珍山 북서쪽 기슭 광산구 임곡동 사호리에 황룡강을 바라보며 400여년의 사연을 품은 정자가 있다. 조선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가학정이다. 정자 오른쪽에는 학문을 위한 성성재惺惺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보살이 운영하는 작은 암자가 되었다.용진산은 동굴과 폭포가 있고 어등산과 같
광주인(光州人). 본관은 경주 (慶州)이다. 아버지는 이희광(李熙廣), 할아버지는 부사府使를 지낸 음애(陰崖) 이은(李誾)이다. 성품이 강개(慷慨)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호남절의록》(1799) 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영광에서 기효증奇孝曾과 함께 군량을 모아 광주(光州)의 의소(義所)로 보내고 동지(同志)들과 더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본관은 장흥.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태헌(苔軒)이다. 환갑의 나이,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해 광주의병의 첫머리에 오르내린다.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이다. 1552(명종7년)년 진사가 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갑
임진왜란 때 왜군의 포로가 되어 순절한 이백춘(1537∼1592)은 병사 이종우(李從愚)의 증손이다. 자는 영경(榮卿), 본관은 함평이다. 광산구 등임동 방혜마을에서 태어나 1558년 용봉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된 중봉마을(저불)로 이사했다.천성이 강직하고 문학절행(文學節行)이 뛰어난 그는 용봉동으로 옮긴 그해 사마시에 급제
후금(청)과 싸우다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한 전상의(1575∼1627)는 자는 희원(希元) 또는 환중(桓仲), 본관은 천안으로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그는 광주목 도촌면, 현 남구 사구동에서 아버지 용(蓉)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서 태어나 정묘호란 때 안주성전투에서 순절하여 북구 화암동 239번지 묻혀 있다.그는 어려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