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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147건)

염주동
염주동(念珠洞)은 법정동이나 행정동도 아니면서 운천동처럼 정식동처럼 여겨진다. 김경수(사)향토문화진흥원장의 2007년 글에 다르면 다음과 같다..  염주마을은 1912년 도천면(陶泉面), 1914년 효천면(孝泉)면, 1935년 효지(孝池)면 주월리에 속했다. 주월리는 염주(念珠)와 월산(月山)마을에서 이름을 따왔고, 1955
송천 양응정(1519~1581)
양응정은 1519(중종14)년 전라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자는 공섭(公燮), 호 송천(松川)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양담梁湛,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김씨로 김화金話의 딸이다. 형은 동래부사를 지낸 양응태이고 의병장을 지낸 양산숙이 셋
충효동-무등산無等山
무등산無等山 : 광주 지한면(池漢面)의 장복면(長福面), 석저면(石底面)의 신촌리(莘村里)에 위치해 있고 지산면(池漢面)에도 걸쳐 있다. 현 전남 화순군 이서면과 북구 충효동이다.- 朝鮮地誌資料(1910)
김윤현
김윤현金胤鉉은 광산김씨로 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화순현감(1878), 서흥부사, 안주목사, 남원부사(1886), 광주목사, 보성군수,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화순군 화순읍 대리 154번지(한고을길 16)에 있는 충신 정려각인 칠충각의 기문을
최상현
일농(一聾) 최상현(崔相鉉, 1881~1945)은 광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명구(1860~1924)의 장남이다. 일제강점기 때 언론에서는 최상현은 좋은 인물로, 때로는 악덕지주로 보도하기도 해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전문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겨둔다.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n
금곡동-불당재
불당-재(佛堂一) 【고개】 서름 남쪽에서 화순읍으로 가는 고개이다. 불당이 있었다.-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
화순-규봉암奎峰庵
규봉암奎峰庵 : 광주 지한면(池漢面)의 장복리(長福里)에 있다. 현 전남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이다. 규봉암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학동-학동삼거리
학동-삼거리 【길】 학동 2구에서 운림동 증심사와 화순군으로 가는 세 갈림길-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
이지호 李贄鎬
이지호(李贄鎬, 1836~1892)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아들 이승우(李承愚, 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서양 오랑캐에 대응하여 자주적인 사상
지남정사
광주 지남정사(芝南精舍)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지호(李贄鎬, 1836~1892)가 지어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지냈던 곳이다. 이지호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중국을 존중하고 서양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의 최익현(崔益鉉), 이항로(李恒老),
조양대 朝陽臺
광산구 박호동 산131-1 송천 양응정(1519∼1581)은 1519년 화순군 능주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앵팽손이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화순 중조산 아래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은둔하였을 때 조양대朝陽臺에서 수학했다. 조양(朝陽)은 아침해가 뜨는 동산으로, 오동나무가 이곳에서 자라 봉황새가 산다고 한다. 시경(詩經
선교동-너릿재
너릿-재(판치, 널재, 너리재) 【고개】 교동 남쪽에서 화순군 화순읍으로 가는 큰 고개이다. 늘어진 것처럼 밋밋하다.- 한글학회(1982), 한국지명총람
임류정 臨流亭
광산구 박호동 480-8 임류정은 조선 전기 유학자인 송천 양응정(1519~1581)이 조양대와 함께 지은 누정이다.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교리 양팽손梁彭孫의 아들이며 동래부사를 역임한 양응태梁應台의 동생이다. 그는 처가가 있는 박호마을로 거처를 옮겼다.현재 누정은 임류정중수기에 따르면 1994년에 보
월파장서루 月坡藏書樓
광산구 서봉동월파장서루는 화정(花汀) 박원국(朴源國)이 지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노사 기정진이 쓴 기문이 전하고 있어 조선말 서양세력의 침략기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광주읍지》(1879, 1924)에서는 주의 서쪽 36리에 있다. 승정원 일기 고종 14년 정축(1877)  8월 21일에 보면 조선시대에도 불우이웃
영추재 永追齋
주의 서쪽 40리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40리에 있다. 광산구 동곡동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화순군 동곡면 하산리 매상마을에 살던 김중배金重培가 이를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1893년 알성시 병과(丙科)에 등과한 오학선吳鶴善(1853~?)이 쓴 기문과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의 상량문이
영귀정 永歸亭
남구 사직동   <광주1백년>의 저자 박선홍은 남구 사직공원 정상 부근에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자는 사직단 옆에 있는  영귀정永歸亭을 말한다. 같은 이름의 영귀정이 가까운 곳에는 화순군 춘양면 회송리 칠성마을에 있고 옥과 영귀정은 송강 절철이 '玉果永歸亭題詠'이라는 시를
서헌정사 瑞軒精舍
북구 생룡동   북구 생룡동에 태어나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 서헌瑞軒 범윤기范潤奇(1850~1923)가 만년에 지은 서헌정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그는 자가 찬도贊道이다. 그의 부친은 심재心齋 범재준范再駿(1822~1857), 자는 인헌仁憲이며 심재유고(心齋遺稿)가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경학과 성
삼괴정 三愧亭
북구 금곡동 산17-5 북구 무등산으로 가는 길에 충장사에서 광주호 방면에 금곡동이 나온다. 금곡동 입구 삼거리 길에서 소쇄원으로 가는 도로 옆 하천변 윗골(金감마을)의 꾀꼬리 당산나무가 있는 곳에 삼괴정이라는 정자가 하나 있다. 삼괴정은 1900년 괴암槐庵 문병일文炳日(1877~1948)이 부친 삼괴三愧 문유식文愉植의
분수원 分手院 누각
동구 학동 무등산 앞 분수원은 지금의 동구 학동 일대로 보이는 남문 밖에 있었다. 동구 원지교 일대로 오늘날 학동에 속하는 원머리마을은 아주 오래전 분수원 역원이었다. 즉 관리들의 주막이었다. 이곳에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들의 휴식 공간의 물길이 있었고 그 변에 반드시 누각이 있었다.좀 더 동쪽으로 난 길을
봉생정 鳳笙亭
동구 충장로 2가   광주읍성 내 황화루 동쪽 지금의 동구 충장로2가에 있었다는 봉생정, 1760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금폐今廢라 했고 《광주읍지》(1879, 1924)에도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다.황화루의 동쪽에 있던 누정인 봉생정은 《동국여지지》에는 나오지만 《여지도서》에는 ‘지금 없어졌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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