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서산瑞山이고 유곡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거의하여 초토사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병량막취의병장兵糧幕聚義兵將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강화도에서의 전공으로 군기시주부 벼슬이 제수되었다. 1593년 6월에 왜장 가등청정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김천일과 같이 순절하니 호조판서에 증직되었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
고종후(高從厚, 1554~1593), 湖節1下-163-2, 光州, 壬辰, 孝烈公-《호남절의록》(1799)고종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부봉(阜峯)이다.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
고인후(高因厚, 1561~1592), 湖節1上-04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고인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7년 진사
고순후(高循厚),는 고경명 장군의 넷째아들이다. 湖節4下-125-1, 光州,丁卯, 靜軒《호남절의록》(1799)1627년(인조5) 2월 7일에 고순후가 찰방 안방준에게 보낸 편지에는 정묘호란의 급박한 사정을 언급하고 호소사(號召使)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모집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했다. 또한 호남의병장에 같이 천거된
호남절의록, 고성후(高成厚), 湖節1上-063-2, 光州, 高敬命 同倡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의 자는 여관(汝寬), 본관은 장흥(長興). 목사 경조(敬祖)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54년(명종 9) 6세 때부터 조부 고중영(高仲英)에게 수학하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다.김언거는 1525년(중종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한 뒤 이듬해 예조좌랑 및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2년에는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었고, 1545년에는 금산군수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스물여덟에 《주자대전》 100여 권을 탐독한 후 네 권의 「주자문록」을 남겼다. 경연에서 선조에게 전한 말을 묶은 《논사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몰재
남구 행안동 구남마을 광유재(光裕齋) 뒤에는 함양윤씨 입향조 윤지화 묘가 있다. 남촌(南村) 윤지화(尹之和 1476-1558)는 연산군 때
중종반정이후 이곳에서 난을 피해 머물렀다.광유재는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로 224-7(행암동 9번지) 빛고을건강타운 앞 효덕로(孝德路) 북동편 신현산(新峴山) 아래 위치해 있다. 함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자는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본관은 장흥(제주)이다. 제봉 충렬공 고경명( 高敬命)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조는 현감을 지낸 고자검, 증조는 기묘명현인 하천 고운(高雲), 조부는 하헌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울산 김씨 부제학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1577년 선조 10년 (정
남구 원산동근방 마을에 청사(晴沙) 고용후(高用厚, 1577-1648)의 영정을 모시는 청사영당(晴沙影堂)이 있었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 철폐 이후에 고용후의 영정은 포충사 동재로 옮겼다.고용후는 자가 선행(善行), 호는 청사(晴沙) , 본관은 장흥(제주)이니 제봉 충렬공 고경명의 여섯째 아들이다. 고조는 현감을 지낸 고
북구 환벽당길 10 (충효동)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
북구 풍암제길 117 (금곡동)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했던 집의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1571~1621)가 지은 정자이다. 풍암정은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동쪽 20리에 있다.‘풍암’이라는 이
고경명의 후손으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정곡리에 살고 있던 고재붕(高在鵬, 1869~1936)의 유서석기(遊瑞石記)에 초연루(超然樓)가 등장한다.유서석기는 그의 나이 27세 때인 1895년 4월 여름에 정자앙(子仰 鄭海隣)과 함께 서석산을 오른 뒤에 슨 글이다. 이 글에는 원효암에서 김안중(金晏仲), 고경좌(高敬佐) · 김선명(金
동구 증심사길 177 (운림동) 증심사 취백루는 일종의 범종을 설치해 놓은 건물이었다. 범종을 설치한 건물은 흔히 단층일 때는 범종각이라 하고 2층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을 때는 범종루라고 한다. 증심사의 범종루는 특별히 시적 운치가 있는 취백루라 했다.취백루는 정유재란 당시 증심사 건물이 모두 불타버린
남구 압촌길 78 (압촌동) 남구 제봉산 하록에 있다. 이 정자는 고경명의 종손인 남주 고영문(1841~ ?)이 피서 겸 휴식처로 그의 집 앞에 지은 2칸 와가의 조그마한 건물이다. 비록 그의 이름은 정자라 하지만 그의 규모로 볼 때 어느 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촌각에 불과하다. 의병장 고경명의 옛터에 후손들이 1917
남구 이장동 266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양과정이 주의 서남쪽 20리에 있다. 일명 간원대諫院臺이다. 이 지역 출신 인물들이 간관諫官으로 많이 진출하여 국사를 논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고경명의 별장이라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600년대 중반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편액 '良苽洞亭'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