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금남로1가 지금의 민주의 종각 옆 건물 상무관 주변에 소빈헌과 함께 관누정 중 월소루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객사의 동쪽에 있는 하모당 서쪽 10보의 지점에 소빈헌이 있다. 바로 옆 건물인 셈이다. 광주목사로 부임한 한성우(1633~1710)가 광주 동헌 하모당 서쪽에 지었다. 목사 한성우는 170
광산구 선암동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제35권 광산현光山縣 편에 광주 주변의 역으로 선암역은 현의 서쪽 40리에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도 주의 서쪽 40리에 있는 데 또한 관원 전용 주막인 원院이 있다고 했다. 이곳은 유배자들도 쉬어 자는 곳이었다. 1750년대 초반에 제작된 해동지
광산구 내등길 265 (내등마을) 황룡강의 송산교에서 임곡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내등마을이 나온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어등산 북쪽 기슭에 불환정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불환정의 주인은 임덕원(1713~1787)이다. 조선중기의 유명한 처사로 부귀와영화
광산구 신흥동(도호동) 광산구 신흥동 도호마을엔 조선시대 예문관·집현전·홍문관·규장각 등의 종2품 관직 증贈 제학提學을 지냈던 심재 박원명朴源明(1847~ ?)이 축조한 불원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 거리인 도호마을에 있다. 불원不遠은 멸망의 선례는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으로 ‘다른
남구 고싸움로 2(칠석동) 부용정은 감사 부용 김문발(金文發, 1359~1418)이 1411년에 별장으로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남쪽 30리에 있다. ‘부용’은 송宋의 주돈이周敦離가 ‘애련설愛蓮設’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송하였던 것에서 따온 것이다. 정내에는 창암 이삼만의 '芙蓉
동구 충장로 2가 광주읍성 내 황화루 동쪽 지금의 동구 충장로2가에 있었다는 봉생정, 1760년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금폐今廢라 했고 《광주읍지》(1879, 1924)에도 지금은 없어졌다고 했다.황화루의 동쪽에 있던 누정인 봉생정은 《동국여지지》에는 나오지만 《여지도서》에는 ‘지금 없어졌다’고 한
서구 용두동 산 79번지 서구 용두동 봉학마을 깊숙한 꽤 높은 곳 봉황산 가파른 중턱에는 한 지식인이 시대적 아픔에 어쩌지 못하고 읍궁암泣弓菴에서 울분을 삭히며 세상을 마감했던 유서 깊은 흔적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의 거리인 봉황산에 위치해 있다.주변에 큰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봉산
광산구 두정동 산82《광주읍지》(1879, 1924)에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고 했다. 기대승이 출가해 처음으로 생활한 곳으로 옛 소고용리召古龍里에 속해 있었다. 고봉의 8대손 종손 연기 현감 기상익 이후 1760년께 퇴락되었다. 광산구 임곡 본량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경명의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거리에 김기현이 건립하였다. 후석 오준선의 기문이 있다. 이 기문에 백암은 서석산 북쪽의 연화봉 아래 있다고 하였다. 김기현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화순 동복에 거주한 농재 김곤변의 8세손 김윤겸金潤謙의 아들이다김기현이 작고한
남구 칠석동 30 (이리마을) 참봉 서태환徐台煥(1857~1940)이 세상을 비관하여 숨어 지내기 위해 고싸움놀이 전수관 바로 뒷편 마을에 당시의 일제강점기 세상을 비관하여 스스로 종적을 감추기 위해 1922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서태환이 젊어서 문학적 재능이 있어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나 한
북구 일곡로 51번지 모룡대는 1934년 노종구가 부친 곡은 谷隱 노훈규(1844∼1915)의 유적을 기념키 위해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 효자란에 노훈규가 기록돼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초미니 정자에는 글이 새겨진 목판이 21개나 걸려있어 버거울 정도다.원래 모룡대가 있던 곳은 임금[龍]을 중심으
북구 북쪽 10리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거리에 있는 건물로 죽산안씨 20세인 명수明水 안정환安正煥(1843~1909)이 지었다.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안정환의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유(德有)이다. 그가 정자에서 교차하는 만감으로 읊은 시에서 정자를 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명수라는 이
주의 북쪽 10리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에 있다. 1879년판은 신와 이복근이 지었다 했는데, 1924년판에는 국포國圃 이규서(李奎緖, 1734~1775)가 건립한 것으로 수정됐다. 이규서의 제영에는 명봉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금琴과 서書를 좋아하는 늙은 나이 이내 몸이시냇가 서쪽 가운데에
북구 일곡동 (일동마을) 만취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5리에 있다. 만취(晩翠)는 논어 자한(子罕) 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는 것처럼 의지를 굳게 가져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세한(歲寒)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남구 노대동 473 만오 윤하검(1813~1905)을 위해 1902년 그의 두 아들인 희진喜鎭, 희성喜聖 형제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 거리에 있다. 윤하검은 집이 가난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성품 때문에 항시 시인 묵객들이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윤하검은 종이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에
동구 계림동 동계정/동계초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 등촌(登村)마을은 청풍이라는 동이름 처럼 산수가 수려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자연마을이다.등촌(登村)마을 골짜기 대밭골에는 1774년(영조 50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후에 증지
남구 서오층석탑2길 15 (광주공원)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남쪽 1리 정도의 거리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광주지역 당호로 비서승秘書丞의 벼슬을 지낸 부호 사범士凡 임병룡(1846~ ?)이 1927년 정자를 지어 노인들의 유회소로 활용하였다. 별칭으로 관덕정이다. 당시 임병룡은 光州郡 不動坊面 社洞 4統3戶에 주소를 두
남구 석정동 120 석정동 출신의 나주나씨 지재 나창을 선조로 1881년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1826-1885)가 건립한 휴양 겸 강학소인 초가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마을 북쪽 길로 가다보면 왼쪽 모퉁이에 남덕정이 자리하고 있다. 현와 고광선 등에게 성리학과 도덕을 전수하여 수많은 인
광산구 신룡동 391-12 (신촌마을)《광주읍지》(1924)에서 낙암은 주의 북쪽 40리 거리에 있다고 했다. 신촌마을 뒤 중앙 언덕에 기씨의 재각인 청량재淸凉齋와 함께 낙암정이 있다. 낙암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성리학을 강론한 곳으로 1570년에 짓고 그 아래 동편에 수칸數間의 우사寓舍를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