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 환벽당길 10 (충효동) 환벽당은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가 노년에 자연을 벗 삼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건립한 남도지방의 전형적인 유실형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 가까이에는 무등산 원효계곡의 물이 흐르며 계곡 아래 증암천甑巖川 주변에는 배롱나
광산구 동곡분토길 195 (본덕동) 호가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 때 계유정란에 공을 세워 정란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세조 때 중추원첨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조참판을 지낸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무이구강武夷九江의 위에 있다.
남구 노대동 산 56 (노대마을) 노대마을에는 현주 윤경(尹熲, 1590~1634)이 지었다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에 있다. 함안윤씨들은 노대마을과 대동마을에 자작일촌을 이루며 지금도 살고 있다. 남구 행암동 구남마을 광유재光裕齋 뒤에는 함양윤씨 입향조 남촌 윤지화의 묘
광산구 하남산단9번로 62 (안청동) 하남산단 9번 도로 안청공원 끝 숲길 입구에는 풍천대라는 삼층석대三層石臺가 있다. 처음엔 안청동 계안마을 앞 안산案山 비룡등飛龍嶝 순천박씨 선산에 있었다. 이곳이 하남산단으로 편입되면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 거리에 있다. 석음 박노술(1851~1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광주의 동헌을 하모당이라 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남쪽의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회랑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각과 삼문 등 총 15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하모당이 객사의 동쪽에 있다. 건물의 정확한 형태
북구 풍암제길 117 (금곡동) 조선 선조와 인조 때 활동했던 집의 풍암楓巖 김덕보金德普(1571~1621)가 지은 정자이다. 풍암정은 무등산 분청사기 박물관에서 원효계곡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계곡 건너편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 따르면 주의 동쪽 20리에 있다.‘풍암’이라는 이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20리에 있다. 지금의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광산구 월계동 탁송정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정공文貞公 죽정竹亭 탁신卓愼(1367∼1426)이 당시 천곡리에 지었던 정자였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35리에 있다. 기록에는 주춧돌만이 남아있으며 노송이 있어 탁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지금은 주택단지로 변모하여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광산구 광곡길 77 (광산동) 칠송정은 함재(涵齋) 기효증(奇孝曾 (1551~1616)의 작은 정자이다. 아버지 고봉 기대승을 3년간 시묘살이 했던 곳으로 원래는 구들이 놓인 움막집 형태로 그의 만년에 지냈던 정자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 떨어진 너브실마을에 있다고 했다. 지금 정자는 원래에 위치
광산구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광산구 용곡동 복룡산 기슭에 진사 김순식金舜植이 지은 관호정觀湖亭이 있었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저절로 무너져 없어지자 그의 후손 김헌기金憲基가 원래의 터에 중건하여 탁금재라고 했다. 송사 기우만의 상량문 및 기문이 있었다.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04-1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50리에 있다. 《호남읍지》(1871)에는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대동지지》(1862~1866)에는 주의 서북쪽 30리에 있다. 평장동에 있는 건물로 광산김씨의 종회소이다. 김윤현金胤鉉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1885년에 종회소로 사용할 본당 10칸과 고
북구 충효동 397-3 취가정은 환벽당 남쪽 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30리 거리인 충효리 뒷산에 있다. 임진왜란 때의 충장공 김덕령(1567~1596)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90년 후손 김만식(1845~1922) 등이 세웠다.주변 정자들 가운데 가장 늦게, 야트막한 산 위에 누대처럼 지었다. 대부
북구 효령동 (학동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북구 효령동, 학동 남쪽에는 황새형국의 황새봉을 향해 깊게 패여 있는 골짜기 점불이 있고 학동 동북쪽에는 쑥대봉이, 동남쪽에는 감나무가 많은 감남골이 있다. 학동마을 뒷산 높은 언덕 위에 초은(樵隱) 이호헌(李顥獻)(1858~1919)이 정자의
북구 용봉동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가는 언덕자락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의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청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의 거리에 만포처사(晩圃處士) 김재화(金在華)가 지었다. 아들은 김
북구 청풍동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지평 증직을 받은 평산신씨 신형申瀅이 건립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저절로 무너져 없어졌다가 5세손 서산거사西山居士 신현정申鉉禎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지금은 없다. 신현정은 덕계(德溪) 신건(申楗)의 후손이다.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
청심당 안용환安龍煥(1857~1911)이 지었다.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인으로 공부했다. 청심당의 기문은 기우만이 썼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광주읍지에 기우만의 기문과 1921년 2월 20일 안용환(安鏞煥)이 박봉혁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또 기우만이 쓴 청심당기(淸深堂記)는 "光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일부 기록에 따르면 중사정(衆斯亭)은 김윤현(金胤鉉), 김오현(金五鉉)이 1925년 경 지은 정자라고 했다. 이곳은 평장사(平章事) 근처에 있는 광산 김씨 종회소였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 했다. 김영수, 김영녹, 김수현, 김덕수 등의 기문과 시문이 1925년에 편찬한 《광주읍지》에 남아 있다는 것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청풍마을에 있는 건물로 남평문씨의 여러 종친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학문을 강학했던 장소이다.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1837~1886)은 노사 기정진의 제자로 죽파재에서 많은 후학을 배출했다. 기정진의 기문과 위당 신헌의 제액이 있다. 문
북구 생룡동 (생룡마을) 광주패밀리랜드 건너 생룡마을 뒷산인 죽취산 기슭에 금성범씨 모정 범형식范瀅植(1872~ ?)의 죽취정이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30리에 있다. 죽취정은 그의 선묘가 있는 근처에 1895년 추모의 정자 성격을 띠었다. 그의 아들 범희채范熙埰가 중수하였다.주인 범형식은
동구 금남로1가 (하모당 서쪽) 광주읍성은 주위가 8천2백53척이고, 높이가 9척이며, 안에 우물 백 개가 있었다고 전해 꽤 큰 읍성터였다. 흔적조차 사라진 그곳에 누각 제금루가 있었다. ‘제금製金’은 ‘춘추좌씨전’에 나온 말로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히듯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나타내는 말이다.《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