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구 외등길151 (등임동) 등림동 외등마을의 어등산 아래에 있다. 한말 때의 유학자 금우(錦愚) 임상희(林相熙, 1858~1931)가 수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임상희는 본관이 평택(平澤)이고 1858년 3월 15일 임곡(林谷) 등림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불환정 주인 임덕원의 종손이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일식
무성한 푸른대는 황계(黃鷄)에 비치고맑고 찬기운 세모(歲暮)에 과시함을 점쳐얻었네.벗을 기다리는 뜰가에 가을 빛이 늦고옷깃을 씻은 난간엔 저녁빛이 나직하네. 바람앞에 거문고는 스스로 서리앞의 가지를 사랑하고달아래 거울은 먼저 비갠 언덕에서 보네.오늘에 쫏고 가는 기울의 글귀는모름지기 정자위의 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이재(臨履齋), 조선 후기 유학자 오태규(吳泰圭 1795∼1866)가 학문을 강구하고 후학을 강학했던 곳이다. 자는 덕현(德現)이고, 호는 임이재(臨履齋), 나주(羅州) 오(吳)씨다. 증조부는 오수원(吳洙源)이고, 조부는 오정상(吳正相)이며, 부친은 오영효(吳榮孝)인데 모두 문학으로 이름을 드
북구 일곡로 41번길 41-8 옛 일곡동 자연부락 주택가 안에 일신재가 자리하고 있다. 일신재는 일곡동 절효사節孝祠와 함께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20리 거리에 있다. 원래 있던 사우가 철폐된 이후 탕 임금의 반명盤銘을 따라 그 이름을 일신이라 했다. 은나라 탕임금은 세수 대야에 날마다 새롭게 한
전남 나주 월파정(月波亭), 평동면의 박국보(朴國輔)가 지어 지냈던 곳이다.지금은 사라지고 1935년에 편찬한 조선환여승람에 전하고 있다. 평동면은 1949년에 삼도면과 본량면, 평동면을 광산군으로 이속시키고 지금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을 말한다. “월파정 아래에 목란의 배를 띄우리라 月波亭下泛蘭舟”
남구 백운동 참봉을 지냈던 함평이씨 이계환李啓煥이 일제강점기에 세운 운석당이란 정자가 있었다. 운석대雲石臺라고도 불렀다. 정자 주인 이계환이 지은 시에 이교泥橋가 나온 것으로 보아 백운동에 정자가 있었을 것이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2007년 당시 주월경로당 최수흥 회장(81)의 고문서 자료에 1891년 참봉 이계
북구 서하로 243 (오치동) 한말에 좌승지를 지낸 오산 이용헌이 오치의 산수를 사랑하여 오치동의 산 정상에 작은 정자를 지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인 송천 이계익이 1911년 부친의 뜻을 이어 이 정자를 오치의 안산案山에 완성하고 아버지의 호를 따 오산정이라 이름했다. 《
광주광역시 동구 오방정(五放亭), 지금은 춘설헌으로 이름이 바뀐 집이다. 증심사와 약사사를 올라가는 길 등산로 산 기슭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다. 기존의 정자와는 다른 방 두짜칸짜리 집과 같다.이곳은 독특한 사연이 있다. 기독교 목회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한센병환자 구호사업가였던 최흥종崔興琮(1880~1966)이
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에 양호재(養浩齋) 정한겸(鄭漢謙)이 지어 지냈던 곳이다. 1935년에 충남 공주(公州)의 유학자인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전하고 있다. 양호(養浩)는 ‘호기를 기른다.(養浩氣), 즉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광산구 광곡길 73 (광산동) 애일당은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로 일컫는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광곡(廣谷 너브실)마을에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2015)이 지낸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고 있다.너브실에서 가장 유명한 집이 고봉의 13대 후손 기세훈(奇世勳, 1914∼현재)의 고택이다. 애일당(
동구 계림동 동계정/동계초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 등촌(登村)마을은 청풍이라는 동이름 처럼 산수가 수려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자연마을이다.등촌(登村)마을 골짜기 대밭골에는 1774년(영조 50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후에 증지
광주시 광산구 평동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1869~1932)이 학문을 강구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지어 지냈던 곳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당시에는 전남 나주 평동면平洞面에 있었으며 평동면은 1949년에 삼도면과 본량면, 광산군으로 이속시키고,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변했다.이중권의 자는 경구敬球, 호는 묵헌黙軒
남구 석정동 120 석정동 출신의 나주나씨 지재 나창을 선조로 1881년 덕암德巖 나도규羅燾圭(1826-1885)가 건립한 휴양 겸 강학소인 초가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 마을 북쪽 길로 가다보면 왼쪽 모퉁이에 남덕정이 자리하고 있다. 현와 고광선 등에게 성리학과 도덕을 전수하여 수많은 인
동구 계림1동 (옛 경양방죽 인근)동구 계림동과 중흥동 일대에 있었다고 하는 경양방죽, 이 호수에 있었던 경호정景湖亭, 경호대景湖臺, 경호루景湖樓 등 세 정자를 가리켜 경양모정이라 한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북쪽 5리에 있다. 광주목사 김선(金銑, 1750~1837)이 경양호 풍치를 관망하기 위해 1804년 전
이선제(李先齊,1390~1453)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보(家⽗)이며 호는 필문(蓽門)이다. 남구 이장동에서 태어났다. 이기(李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밀직제학 이홍길(李弘吉)이고, 아버지는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司僕卿), 장흥도호부사를 지낸 이일영(李⽇英)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양촌 권근(陽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1023(북구 송강로13)김덕령(金德齡) 박광옥(朴光玉) 오두인(吳斗寅) 김덕홍(金德弘) 김덕보(金德普)를 배향한 사우1604년(선조 37) 창건1604년(선조 37) 창건 당시 명칭 「벽진서원(碧津書院)」, 박광옥(朴光玉)을 제향1678년(숙종 4) 지방사람들의 발의로 김덕령(金德齡) 추향, 명칭 「의열사(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