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관 崔關 태종 15년(1415) 8월 16일∼태종 18년(1418) 3월 25일최관(?∼1424)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자고(⼦固), 호는 월파정(⽉波亭)이다. 1377년(우왕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2년(우왕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392 년 예조총랑이 되었으나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조선개국 뒤 풀려났다. 1
정진 鄭津 태종 7년(1407) 12월 26일∼태종 8년(1408) 7월 22일정진(1361∼1427)의 본관은 봉화(奉化),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의 아들이다. 1380년 성균관시 합격, 낭장이 되고 사재령, 영주지주사, 전농령을 지냈다. 1391년 정몽주 등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아버지 정도전과 함께 삭직되었다가, 1392년에 조
안준 安俊 태조 2년(1393) 10월 20일∼태조 3년(1394) 10월 2일안준(?∼?)의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노포(蘆浦)이며, 아버지는 중랑장 안손주(安孫拄) 이다. 정몽주의 제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남양부사, 연안부사를 지내고 전라 충청 경상 삼도체찰사, 봉상시 판사를 지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되자 그 일당으
김리 ⾦履 우왕 12년(1386) 9월∼우왕 13년(1387) 7월김리(?∼?)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문헌은 확인이 어렵다. 그의 행적은 『고려사』 1392년 (공양왕 4) 5월 17일 기록에 보인다. 사헌부 겸 대사헌 민개(閔開) 등이 상소하기를, “예조판서 김리(⾦履)는 젊어서부터 권세가에 붙어서 별다른 재행이 없는데도 외람되게 관작을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이식(李植) 택당(澤堂)공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이니 세상에서 고봉(高峯) 선생이라 칭하기도 하고 혹은 존재(存齋)라고도 칭한다. 기씨(奇氏)는 관향이 행주(幸州)인데, 행주는 지금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예속되어 있다. 선대는 고려 때에 현달하여 장상(將相)과 훈척(勳戚)을 배출한 문벌의 융성함이 국
정홍명(鄭弘溟) 기암(畸菴)선생의 휘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 관향은 행주(幸州)이다. 행주에 고봉 속현(高峯屬縣)이 있어서 이 때문에 자호를 고봉(高峯)이라 하였다.기씨는 고려조에 무예(武藝)로 입신하여 장상(將相)을 지낸 이가 퍽 많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휘 면(勉)이 공조 전서(工曹典書)
세종(世宗) 가정(嘉靖) 6년 중종대왕(中宗大王) 22년○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갑진시(甲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이니,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물재(勿齋) 선생 기진(奇進)이 아우 준(遵)과 함께 유학(遊學)
복애 범세동(伏厓 范世凍 : ?~?)은 고려말 사람으로 정몽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간쟁의 책임자인 간의대부가 되었다. 선생은 도덕과 의리가 뛰어났는데,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우려 하자 이에 맞서 충절을 지켰다.선생은 고려왕조가 멸망하
전 우군 총제 김첨의 졸기 - 태종 18년 무술(1418) 5월 4일(계축) 전 우군 총제(右軍摠制) 김첨(金瞻)이 졸(卒)하였다. 김첨의 자(字)는 자구(子具)이요, 옛 이름은 구이(九二)인데, 광주(光州) 사람으로서 자혜부 윤(慈惠府尹) 김회조(金懷祖)의 아들이었다. 10세에 속문(屬文)에 능하였고, 장성하게 되자 경사(經史)ㆍ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직무 수행 기록 - 미산집 제8권 / 기(記) : 한장석(韓章錫, 1832~1894)갑술년(1874) 2월에 나라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어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고 호남좌도에 가게 되었다. 3월 상순 임자일에 대궐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고 계판(啓板) 앞에서 별도로 분부를
무송 유씨 족보 서〔茂松庾氏族譜序〕 : 강재집 제5권송치규(宋穉圭, 1759~1838) 《강재집(剛齋集)》 나는 목천(木川) 현감(縣監) 유공(庾公)의 묘표(墓表)를 선조의 글에서 읽어 본 적이 있다. 그 재기(才器)가 보통 사람을 뛰어넘지만 지위가 덕행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또 유씨(庾氏)가 실로 고려 왕조
범세동선생묘范世東先生墓는 광산구
덕림동 산 94-1에 있다.고려시대의 학자 범세동(范世東)의 묘로 1998년
2월 12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범세동의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이며, 錦城이 본관이다. 증조인 承祖가 南宋의 예부시랑을 지냈는데 남송이 멸망하자 고려에 망명하였고,
서구 금호운천길 31 (금호동) 존심당(存心堂)은 병천사(秉天祠)에 있는 건물이다. 아파트 숲속에 색다른 문화와 깊은 애국정신이 깊이 녹아 있는 곳이다. 존심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중앙 3칸은 대청마루이며 양익간에는 모두 방을 두었으며, 행정(杏亭)이라고 부르고 있다. 존심당은 사당과 내외삼문,
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14세기 후반의 경렴정이다. 주인은 경렴 탁광무(1330∼1410)로 익재 이제현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익점, 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탁광무는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儀로서 신돈에 아부하여 행패를 부리는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다가 파직되었던 강직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신돈 일파의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5(구동 22-3 광주공원 내)에 있으며 광주유형문화재 제9호(1985년 2월 25일)이다.1398년(태조 7)에 서석산(瑞石山) 아래 창건1488년(성종 19) 현감 권수평(權守平)이 현재 위치로 이건정유재란 때 소실1974년 대성전 보수 및 단청1976년 동·서재 수리1978년 명륜당1981년 담장 및 외관수리 광
광주시 남구 원산동필문 이선제의 부친인 퇴은退隱 이홍길李弘吉 신도비퇴은 이홍길(1324~140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계방桂芳.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광산光山. 밀직부사기의 아들로 이장동 출신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업에 탁월하고 시문에 밝았으며, 역리에 통달하여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제학과
광주시 북구 생룡동 136-1 (생룡마을 입구)1951년이 유인정씨효열비(孺人鄭氏孝烈碑)는 범희덕范熙德 짓고 김진현金珍鉉 쓰다. 생룡마을의 범씨 문중 松林 범만식 선생에게 19세에 시집 와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한평생을 수절한 연일정씨 효열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