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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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4/ 관방(關防) - 전라도(全羅道)

만기요람(萬機要覽,1808) 군정편 4/ 관방(關防) -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 읍성 석축. 둘레 2,618보.위봉산성(威鳳山城). 석축. 둘레 5,097파(把) 영로 : 웅치(熊峙)진안과의 경계.이치(梨峙)진산(珍山) 통로.소치(掃峙)임실과의 경계. 이치(履峙) 금구(金溝)와의 경계.새장치(塞墻峙)남쪽 통로.귀신치(歸信峙)금구(金溝)와의 경계.만마동(萬馬洞). 남쪽 통로.
【익산(益山)】 기준성(箕準城). 석축. 둘레 3,900척. 영로 : 내산치(內山峙). 여산(礪山)과의 경계.
【고부(古阜)】 읍성. 석축. 둘레 2,369척.
【금산(錦山)】 읍성은 지금 폐지되었다. 영로 : 송치(松峙)용담(龍潭)과의 경계.송원치(松院峙)진산과의 경계.골남치(骨南峙). 북쪽 통로. 진산
【(珍山)】 영로 : 이치(梨峙) 전주와의 경계.방현(方峴)연산(連山)과의 경계[界].신목치(新目峙). 옥천(沃川)과의 경계.
【만경(萬頃)】 읍성. 석축. 둘레 2,820척.
【임피(臨陂)】 읍성 석축. 둘레 3,674척.고진성(古鎭城). 토축. 둘레 10여 리.
【흥덕(興德)】 읍성. 지금은 폐지되었다.
【부안(扶安)】 읍성. 석축. 둘레 16,450척.
【옥구(沃溝)】 읍성. 석축. 둘레 3,330척.고현성(古縣城). 석축. 둘레 3,490척.
【용안(龍安)】 읍성. 석축. 둘레 4,240척.
【정읍(井邑)】 영로 : 안치(鞍峙)태인(泰仁)과의 경계.우사치(牛死峙)순창(淳昌)과의 경계.노령(蘆嶺)장성(長城)과의 경계. 소노령(小蘆嶺) 흥덕(興德)과의 경계.적치(赤峙)고부(古阜)와의 경계.율치(栗峙)ㆍ입치(笠峙)모두 서쪽 통로.둔월치(屯月峙)동쪽 통로.갈치(葛峙). 동남쪽 통로.
【고산(高山)】 영로 : 탄치(炭峙)동쪽 통로.뉴령(杻嶺). 용담(龍潭)과의 경계.
【태인(泰仁)】 영로 : 정치(鼎峙)동쪽 통로.뉴치(杻峙)남쪽 통로. 굴치(屈峙) 순창(淳昌)과의 경계.구절치(九折峙)남쪽 통로.사슬치(沙瑟峙)순창과의 경계.운암치(雲巖峙). 임실(任實)과의 경계.
【나주(羅州)】 읍성. 석축. 둘레 3,126척. 영로 : 영원치(嶺院峙). 영암과의 경계.
【장성(長城)】 입암산성(笠巖山城)석축. 둘레 동쪽이 1,300여 파, 서쪽이 1,400 파(把).구진성(丘珍城). 석축. 둘레 400척. 영로 : 새치(塞峙)창평과의 경계.사라치(沙羅峙)영광과의 경계.곡도치(曲道峙)순창과의 경계.월은치(月隱峙). 정읍(井邑)과의 경계.
【영암(靈巖)】 읍성 석축. 둘레 4,369척. 이진진석성(梨津鎭石城) 둘레 1,407척, 높이 8척. 어란진성(於蘭鎭城). 석축. 둘레 1,407척. 영로 : 둔덕치(屯德峙)장흥과의 경계.동치(東峙)강진과의 경계.가학치(加鶴峙)ㆍ마치(馬峙)ㆍ우슬치(牛膝峙) 모두 해남(海南) 통로.건교치(乾橋峙)남쪽 통로.오소치(烏巢峙). 남쪽 100리 지점.
【영광(靈光)】 읍성. 석축. 둘레 1,469척. 영로 : 마차령(磨車嶺) 동쪽 통로.해치(蟹峙). 동쪽 통로.
【함평(咸平)】 기산성(箕山城). 석축 둘레 1,850척. 영로 : 쌍령(雙嶺)남쪽 통로.외치(外峙)나주와의 경계.저치(猪峙). 무안과의 경계.
【고창(高敞)】 읍성. 석축. 둘레 3,080척, 높이 12척. 영로 : 송치(松峙)장성과의 경계.좌아치(佐兒峙)흥덕과의 경계.길사치(吉沙峙). 장성과의 경계.
【무장(茂長)】 읍성. 석축. 둘레 2,639척. 영로 : 백학치(白鶴峙). 동북쪽 통로.
【무안(務安)】 읍성. 석축. 둘레 1,700척. 목포진성(木浦鎭城). 석축. 둘레 1,302척. 영로 : 동령(銅嶺). 남쪽 통로.
【진도(珍島)】 읍성 석축. 둘레 2,400척, 높이 741척.고진도성(古珍島城)석축. 둘레 3,870척. 남도진성(南桃鎭城) 석축. 둘레 1,040척. 금갑도진성(金甲島鎭城). 석축. 둘레 1,050척.
【강진(康津)】 읍성 석축. 둘레 8,402척. 가리진성(加里鎭城). 석축. 둘레 3리(里). 중종 16년 신사(1521년)에 왜구에 대한 요해지로 하여 진을 설치[設]하였다. 영로 : 혈암치(穴巖峙)ㆍ사인암치(舍人巖峙)ㆍ대암치(大巖峙)모두 장흥과의 경계.도음치(道音峙)영암과의 경계.석문(石門). 서남쪽 통로.
【해남(海南)】 읍성 석축. 둘레 2,857척. 우수영성(右水營城). 석축. 둘레 3,848척. 영로 : 삼령(三嶺). 남쪽 통로.
【남원(南原)】 읍성 석축. 둘레 8,199척, 높이 13척. ○ 유인궤성(劉仁軌城)이 부내(府內)에 있다. 당(唐)이 백제를 멸하고 인궤(仁軌)를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로 삼아서 웅주(熊州)에 유진(留鎭)하고 또 여기에 성을 쌓고 인하여 대방성(帶方城)이라 하엿다. 부(府)를 대방이라 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도 옛터가 있다. 또 읍내의 시가를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하여 9개 구로 나누었는데, 그 터[址]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모두들 정전(井田)의 유제(遺制)라고 전한다.교룡산성(蛟龍山城). 석축. 둘레 5,717척. ○ 왜란 때에 중수하였다. 영로 : 복성치(福星峙)ㆍ유치(柳峙)ㆍ여원치(女院峙)모두 운봉(雲峰)과의 경계[界].수성치(宿星峙)ㆍ남율치(南栗峙) 모두 구례(求禮)와의 경계.둔령(屯嶺)남쪽 통로.비홍치(飛鴻峙)순창과의 경계.견치(犬峙) 임실과의 경계.수분치(水分峙). 장수(長水)와의 경계.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 석축. 둘레 4,940척. 영로 : 대독치(大犢峙) 북쪽 통로.멸치(滅峙)순창과의 경계[界].모우치(暮牛峙). 남쪽 통로.
【순창(淳昌)】 노령성(蘆嶺城). 석축. 옛적에 방어와 수비를 위하여 쌓았던 곳인 듯하다. 영로 : 우치(牛峙)옥과(玉果)와의 경계[界].웅치(熊峙)남원과의 경계.연치(鷰峙)ㆍ온월치(溫越峙)ㆍ갈치(葛峙)모두 서쪽 통로.둔월치(屯越峙)정읍과의경계[界]. 굴치(屈峙) 태인(泰仁)과의 경계.사슬치(沙瑟峙). 태인과의 경계.
【용담(龍潭)】 영로 : 호치(虎峙) 동쪽 통로. 고남치(古南峙) 남쪽 통로.한미령(汗未嶺). 서쪽 통로.
【창평(昌平)】 영로 : 유둔치(留屯峙)동남쪽 통로.방하치(方下峙). 동복(同福)과의 경계.
【임실(任實)】 영로 : 슬치(瑟峙)ㆍ화치(火峙)모두[並] 전주와의 경계.말치(末峙)동남쪽 통로.사치(沙峙)서쪽 통로.율치(栗峙)서쪽 통로.종산치(終山峙). 태인과의 경계.
【곡성(谷城)】 영로 : 유치(㹨峙) 서남쪽 통로.지동치(指東峙)동남쪽 통로.마륜대(馬輪臺). 동쪽 통로.
【옥과(玉果)】 영로 : 남치(藍峙)동복(同福)과의 경계[界]. 기우치(騎牛峙). 담양과의 경계.
【운봉(雲峰)】 영로 : 기치(箕峙)ㆍ주치(走峙)모두 남원과의 경계.정치(釘峙)ㆍ팔량치(八良峙). 모두 함양과의 경계.
【진안(鎭安)】 영로 : 율치(栗峙)ㆍ서고치(鋤古峙)모두 장수(長水)와의 경계.마치(馬峙)ㆍ건은공치(件隱公峙)모두 전주(全州)와의 경계.대융치(對戎峙)임실과의 경계.적천치(賊川峙)서쪽 통로.산영치(山影峙)용담과의 경계.학항치(鶴項峙). 고산(高山)과의 경계. 【장수(長水)】 성수(聖壽)산성은 지금은 없어졌다. 영로 : 중대치(中臺峙)진안(鎭安)과의 경계[界].뉴치(杻峙)용담과의 경계.육십치(六十峙)안의(安義)와의 경계.한흥치(漢興峙)남쪽 통로.침치(砧峙). 서북쪽 통로.
【무주(茂朱)】 적상산성(赤裳山城)석축. 둘레 16,920척. 영로 : 고리치(古里峙)ㆍ소이치(召爾峙)ㆍ어격치(於隔峙)모두 남쪽 통로.소사령(素沙嶺)동쪽 통로.호치(狐峙). 동북쪽 통로.
【광주(光州)】. 읍성. 석축. 둘레 8,253척. 영로 : 판치(板峙)화순과의 경계.장불치(獐佛峙)동복(同福)과의 경계[界].새장치(塞墻峙). 장성과의 경계.
【장흥(長興)】 읍성 석축. 둘레 9,004척. 회령진성(會寧鎭城). 석축. 둘레 1,990척. 영로 : 웅치(熊峙)ㆍ오도치(吾道峙). 모두 남쪽 통로.
【남평(南平)】 영로 : 대치(大峙). 남쪽 통로.
【순천(順天)】 읍성 석축. 둘레 3,383척.좌수영성(左水營城). 석축. 둘레 3,336척. 영로 : 송령(松嶺)북쪽 통로.오도치(吾道峙). 서쪽 통로.
【낙안(樂安)】 읍성. 석축, 둘레 1,590척. 영로 : 주지치(周志峙)서남쪽 통로.
【보성(寶城)】 읍성. 석축. 둘레 2,053척. 영로 : 북산치(北山峙)ㆍ삼발치(森鉢峙)모두 장흥과의 경계.노동치(蘆洞峙)ㆍ죽방치(竹方峙)ㆍ가야치(伽倻峙)모두 능주(綾州)와의 경계.일와치(逸臥峙)ㆍ대원치(大原峙)모두 동복과의 경계.도리치(道里峙). 낙안(樂安)과의 경계.
【능주(綾州)】 영로 : 저치(猪峙)동복과의 경계.왜치(倭峙)보성(寶城)과의 경계.웅치(熊峙). 남쪽 통로.
【광양(光陽)】 읍성. 석축. 둘레 974척. 영로 : 웅치(熊峙)동쪽 통로.한치(汗峙)동북쪽 통로.매치(埋峙). 동쪽 통로.
【구례(求禮)】 읍성 석축 둘레 4,481척.석주관(石柱關). 석주진(石柱鎭) 이라고도 함. 【흥양(興陽)】 읍성 둘레 3,800척. 사도진성(蛇渡鎭城) 석축. 둘레 1,800척 녹도진성(鹿島鎭城) 석축. 둘레 1,400척. 여도진성(呂島鎭城) 석축. 둘레 1,000척. 발포진성(鉢浦鎭城). 석축. 둘레 1,200척.
【동복(同福)】 옹성산성(甕城山城). 석축. 둘레 3,874척. 영로 : 운알치(雲遏峙)ㆍ두치(斗峙)모두 순천과의 경계.주로치(朱路峙)화순과의 경계.방석치(方石峙)서북쪽 통로.송치(松峙). 곡성(谷城)과의 경계.
【제주(濟州)】 읍성 석축. 둘레 5,489척. 산저천(山底泉)은 성안에 가락천(嘉樂泉)은 성 밖에 있으며, 따로 이중으로 성을 쌓고 물을 달아올림.조천진(朝天鎭)석성(石城). 둘레 428척.애월진(涯月鎭)석성(石城). 둘레 549척.명월진(明月鎭)석성. 둘레 3,020척.별방진(別防鎭). 석성(石城) 둘레 2,390척. ○ 위의 4진(鎭)은 방호소(防護所)다.
【정의(㫌義)】 읍성 석축. 둘레 2,980척. 수산진(水山鎭) 석축. 둘레 1,164척.서귀진(西歸鎭). 석축. 둘레 825척. ○ 위의 2개 진은 방호소(防護所)다.
【대정(大靜)】 읍성 석축. 둘레 4,910척.모슬진성(摹瑟鎭城)석축. 둘레 315척. 지면이 해면으로 들어가서 다리미 모양처럼 되어서 3면은 바다에 잠기고, 북쪽의 일면이 하나의 길이 될 뿐이다[只爲一路].화북성(禾北城)석축. 둘레 660척.차귀진(遮歸鎭)석성. 둘레 1,466척.동해방(東海防) 석축. 둘레 511척. ○ 위의 2진은 방호소(防護所)다.


〈유성룡 소계(柳成龍所啓)〉 체찰사 유성룡은 아뢰기를, “정유(丁酉)왜란에 왜적이 전라도의 여러 성을 보고 모두들 그 허술함을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金城)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만일 조선이 이 성만 고수했다면 우리 군대가 어떻게 함락시켰겠는가.’ 하였습니다.
○ 남원과 순천은 모두 거진(巨鎭)이며, 그 다음 전주와 나주는 모두 꼭 지켜야 할 성입니다. 남원은 전일에 낙삼장(駱參將)이 성과 참호를 수리하였고, 전주ㆍ나주ㆍ순천의 성들은 지금 곧 수축해야 합니다.
○ 전주에서는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시켜 공주의 세력과 서로 연락케 하고, 남원에는 영(營)을 설치하고, 군병을 조련하여 전주의 세력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항복 소계(李恒福所啓)〉 체찰사 이항복은 아뢰기를,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은 산이 내룡(來龍 종산(宗山)에서 내려온 산줄기)이 없고 우뚝 들판에 솟아나서 두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의 것은 밀덕(密德)이요, 남쪽 것은 복덕(福德)입니다. 산을 둘러 성을 만들었는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으며, 성은 모두 돌로 쌓았으며, 8개의 우물이 있습니다. 유 도독(劉都督)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서 수맥을 따라 우물을 파니 여기 저기서 물이 나왔으므로 유(劉)는 말하기를, ‘성이 크기 때문에 무너뜨리기는 힘이 많이 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성 밖은 서ㆍ남ㆍ북 3면에는 모두 성안을 들여다 볼 만한 높은 봉우리나 언덕이 없고, 밀덕봉(密德峰)과 복덕봉(福德峯)의 두 개의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와 흡사 교룡[蛟] 두 마리가 가운데 나란히 누워있는 듯하여 3개의 골[洞]로 구분되는데, 가운데는 적암(赤巖), 북쪽은 우암(牛巖), 남쪽은 빙암(氷巖)입니다. 두 봉우리는 머리요, 두 줄기는 등심이며, 세 개의 골[洞]은 배[腹]입니다. 내장이 겹겹으로 가리어서 남북이 서로 가로막혔고, 머리와 꼬리가 서로 통하지 못하며, 옆구리와 등심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니, 만일 위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북이나 징 같은 것으로 호령하여도 지휘할 수가 없게 됩니다. 동문(東門)은 적병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인데, 문 밖 대로에는 마소가 다 통행하여 길에서 성중을 굽어보면 벌레나 개미라도 다 헤일 수가 있습니다. 성문에서 수백 보 되는 거리에 우뚝히 솟은 둑이 앞에 있어서 화살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고, 뒷면은 평평하고 넓어서 적이 올 때 군병을 숨겨둘 수가 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일찍이 여기에 군병을 주둔하여 외적[賊]과 싸워서 이를 격파하였습니다. ○ 동복(同福)의 옹성산에는 바위 셋이 있는데, 독처럼 생겼기 때문에 옹성산이라 합니다. 성의 남쪽과 북쪽에 2개의 문이 있는데, 이곳만은 적을 받을 곳입니다. 바윗길이 구불구불 간신히 발길을 통할 만한데, 길은 벼랑 밑으로 나 있고 성은 벼랑 위에 있으므로, 오고 가는 것을 성위에서 내려다 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성 밖 10여 보의 거리에 뾰쪽한 봉우리가 마주보고 우뚝 솟았고, 그 사이는 사람이 나란히 서서 다닐 수 없는 가느다란 길이 있는데, 남쪽에서 서쪽으로 돌아 북쪽에 이르며, 북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게 됩니다. 모두 전석(全石)으로 벽을 이루어 깎아지른 듯이 만 길이나 되어 원숭이라도 통행할 수 없는 길이니, 정말 천연적인 요새입니다. 성 안엔 일곱 군데의 우물이 있는데 수량(水量)이 그렇게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서쪽 봉우리 아래에서 몰래 적벽(赤壁)으로 통하는 길이 있으니 줄을 늘어뜨리면 시냇물을 길어 올릴 수가 있으며, 절벽이 공중에 매달렸으니 적이 도저히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터는 퇴폐한 곳이 많았는데 황진(黃進)이 현감으로 있었을 때에 동북쪽의 한 모퉁이를 가로 질러서 내성(內城)을 쌓았습니다. ○ 담양의 금성(金城)은 어느 시대에 창설되었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역대병요(歷代兵要)에 보면, 고려말기에,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장차 내가 광주의 금성에서 말을 먹이겠다.」 소리쳐 말하였다.’ 하였고, 그 주(註)에, ‘지금의 담양부(潭陽府)에 있으며[在], 속설에 전하기는 우리 태조께서 남원에서 설봉을 넘어와서 적세가 매우 강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불리하다면 퇴각하여 금성을 보존할 것이다.’ 했다는데, 그곳이 바로 여기인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동ㆍ서ㆍ남의 세 문(門)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입니다. 담양으로 해서 올라 가려면 길이 산등성이로 났는데, 한 줄기 길이 백 굽이를 돌아서 6ㆍ7리를 구불구불 돌아가야만 비로소 남문에 닿습니다. 남문 밖은 양쪽이 모두 뚝 떨어진 구렁이며, 동문 밖은 약 6ㆍ70 보쯤 가면 돌이 옆으로 서 있어 비스듬히 성중의 일면을 엿 볼 수 있고, 화살이 바로 들어닥칠 수 있으므로 가장 좋지 못합니다. 지금에 만일 뒤로 물러나가서 양마성(羊馬城)을 쌓는다면 적이 먼저 점령하는 염려를 대비할 수 있습니다. 서문의 양쪽은 산이 모두 높이 솟아서 적이 오더라도 구멍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감히 함부로 직접 들여 밀지 못할 것입니다. 샘이 시루바위[甑巖] 아래서 솟아나서 시내를 이루어 흐르는데 큰 가물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또 우물이 아홉 군데나 있습니다. 동북과 정남(正南)쪽은 석벽이 천 길이나 깍아질러 있고, 성의 지형이 기이하고 웅장하고 넓직하며, 사방은 높고 가운데는 움푹하며, 밖으로 높은 봉우리가 없어서 들여다 볼 수도 없고, 성 밖의 사면에는 가느다란 소로(小路)가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어서 지리적으로 정말 우수한 조건을 갖추었다 할 것입니다. ○ 나주의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서ㆍ남ㆍ북의 3면은 지세(地勢)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1면만이 넓고 평평하여 적(敵)의 공격을 받은 곳입니다. 성중에 우물 다섯이 있는데, 동문과 대곡(大谷)에 있는 두 우물이 가장 큽니다. 또 봉우리 4개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입니다. 정녕봉이 주봉이고 동ㆍ서ㆍ남의 세 봉이 앞에서 쳐다보고 있어서 손짓과 몸짓으로 서로 호응하며, 말소리도 서로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동쪽과 북쪽 두 봉우리의 줄기가 둥그렇게 둘러쌓여서 골[洞]을 이루었는데 군병을 숨겨둘 만합니다. 어떤 이는 샘과 우물이 부족하다고 하지만 성을 쌓을 때에 인부 5,000명이 동문에 있는 우물 한 곳의 물을 마시었는데도 끝내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산이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서 성의 위치가 비스듬하게 자리 잡았는데, 동문 밖은 산등성이로 수백 보의 거리를 뻗어 나가서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러 산등성이에서 성 안을 쳐다보면 탄환의 사정(射程) 범위가 되며, 서ㆍ북 양쪽은 성이 산허리를 둘러있어 지형이 안팎으로 갈라졌는데, 성첩(城堞)을 지키는 사람이 몸이 산 밖에 있게 되니 동ㆍ남의 이면(裏面)과는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서로 호응할 수 없으니, 이는 전술상 매우 꺼려하는 것입니다. 〈역대연표〉를 보면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서 진도(珍島)를 점령하였을 때 본도(本道)를 침범하니, 각 군현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상호장(上戶長) 정여(鄭呂)가 성을 지켜낼 것을 결정하고, 각현의 군병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금성(錦城)을 확보하고 가시나무를 세워서 울타리[柵]를 만들고 상처를 동여매고[裹瘡] 필사적으로 고수하니, 적이 성을 7주야간이나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함락시키지 못하였습니다. 글안이 습격해 왔을 때에 현종(顯宗)이 남하[南巡]하여 여기에 군사를 머물렀습니다. 글안군이 패퇴한 뒤에 현종이 본주를 승격시켜서 목(牧)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 강진(康津)의 수인산성(修因山城)은 병영의 동쪽에 있습니다. 본영에서 남문까지 이르는 데에 좁다란 길이 구불구불 돌아가서 문밖까지 닿았는데, 지형의 경사가 심하여 사람이 나란히 설 수가 없습니다. 북문은 더욱 험준하고 다만 동문만이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문 밖에 마을이 있는데 수덕동(修德洞)이라 합니다. 산세가 불룩하여 성의 안팎이 서로 훤하게 들여다 보이며, 화살이나 탄환이 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동문에서 남쪽으로 나가면 따로 작은 동문을 열고, 문 밖으로 백수십 보쯤 되는 거리에 한 봉우리가 우뚝히 솟았는데 이름을 물희봉(勿喜峰)이라 합니다. 적이 만일 여기만 먼저 점령한다면 성 안 한 쪽에서는 발을 붙일 곳이 없습니다. 선적봉(仙迹峰) 성 밖으로 또 단강(斷崗)이 있어 수십 보 밖에 우뚝 솟았는데 사방이 모두 깍아지른 듯하여 쉽사리 올라가지 못합니다. 노적봉(露積峰)은 주봉(主峰)인데 서ㆍ남ㆍ북의 3면은 천연적 험지를 이루었지만 중간에 불룩한 언덕이 있어서 적병이 타고 들기가 쉽고, 물희봉은 그 중에서도 더욱 불리한 곳이며, 동문의 안과 밖은 아무런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장점이 단점을 덮어 주지 못합니다. 옛적에는 식수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동문 밖 수십 보 거리의 지점에 여러 골의 샘물이 합류되어 시내를 이루며, 지금은 옛성[舊城] 밖에 따로 자성(子城)을 쌓았는데 시내를 둘러 떨어지게 쌓아서 시냇물이 성 안으로 들어와 있고, 둘레는 700척 가량이 됩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고려 말기에 도강(道康)ㆍ탐진(耽津)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영암(靈巖)의 백성이 모두 여기에서 왜구의 난을 피했다.’ 하였습니다. ○ 정읍 입암산성(笠巖山城)은 산세가 높고 험한데 꼭대기가 움푹 파여 있고 사방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가운데가 넓어 성이 그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인데, 모양이 말구유[馬槽]를 시렁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아서 밖에서는 아무리 쳐다보아도 은은한 중에 우뚝한 모양만 있을 뿐 그 내용은 도저히 추측할 수 없으나[莫測] 성중에서 사방 어디를 보아도 눈을 가리는 곳이 없습니다. 샘물은 넉넉하여 가히 말 10,000마리가 먹을 물이 될 수 있습니다. 험고(險固)하기로는 금성(金城)만 못하지마는 지형의 조건으로는 오히려 여기가 좋습니다, 동ㆍ남ㆍ북의 세 문[三門]적(敵)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며 입암(笠巖)이 있는 1면은 위령(葦嶺)으로 통하는 큰 길을 내리누르고 있어 지세가 더욱 기이하고 장합니다.” 하였다.


〈강항 소론(姜沆所論)〉 강항(姜沆)은 말하기를, “여러 곳의 산성이 인가와 서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긴급 사태를 당하여야 비로소 고을의 백성을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적이 멀리 있을 때에는 그 험하고 먼 것을 꺼려서 성에 들어가 지키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적이 가까이 들어닥치면 산과 들로 도망쳐 숨어버리고 명령을 따르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더욱이 이웃 읍들의 주민을 성안으로 들여 온다는 것을 바랄 수가 있는가? 그러니 전라도로 말한다면 금성(金城)에다 담양부를 설치하고, 이웃 몇 개 읍을 떼어서 여기에 합치고, 정읍과 장성을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옮기는데도 또한 이러한 방법으로 하며, 나아가서 경상도의 여러 산성까지도 모두 지방관청의 소재지로 한다면 겹겹으로 주둔한 군대가 서로 바라보면 형세가 서로 의지하여 나라가 저절로 튼튼[自固]할 것이다.” 하였다.


〈이태수 소론(李泰壽所論)〉 이태수는 말하기를, “여산(礪山)은 충청도와 전라도와의 요충이며, 나암창(羅巖倉)은 수륙의 대도회이다. 시가 뒤에 성을 쌓을 만한 곳이 있는데, 전 감사 이시직(李時稷)이 장계(狀啓)를 올려서 윤허까지 내렸으나 아직 착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만일 나암(羅巖)에다 대규모로 창고를 설치하여 100리 안쪽에 있는 충청ㆍ전라 양도 산읍(山邑)의 양곡을 모두 운반 저장하고, 성을 쌓아서 지킨다면 여기서 8도의 군량을 수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1] 이치(梨峙) : 
‘이치(梨峙)’가 어느 본엔 ‘熊峴’으로 되어 있음.
[주-D002] 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에는 ‘路’로 되어 있음.
[주-D003] 우슬치(牛膝峙) : 
‘우슬치(牛膝峙)’가 원본엔 ‘牛滕峙’로 되었는데, 다른 본에 의하여 고쳤음.
[주-D004] 마차령(磨車嶺) : 
‘마차령(磨車嶺)’이 어느 본엔 ‘磨車峴’으로 되어 있음.
[주-D005] 동령(銅嶺) : 
‘동령(銅嶺)’의 ‘銅’이 어느 본엔 ‘洞’으로 되어 있음.
[주-D006] 설치[設] : 
‘설치[設]’가 어느 본에는 ‘故’로 되어 있음.
[주-D007] 웅주(熊州) : 
‘웅주(熊州)’의 ‘州’가 어느 본에는 ‘川’으로 되어 있음.
[주-D008] 터[址] : 
‘터[址]’가 어느 본에는 ‘地’로 되어 있음.
[주-D009] 정전(井田法) : 
고대 주(周)나라의 토지제도. 땅을 ‘井’자로 9등분하은 가구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세(稅)로 바친다.
[주-D010] 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에는 ‘路’로 되어 있음.
[주-D011] 견치(犬峙) : 
‘견치(犬峙)’의 ‘犬’이 어느 본에는 ‘大’로 되어 있음.
[주-D012] 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13] 경계[界] : 
‘경계[界]’가 몇몇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14] 경계[界] : 
‘경계[界]’가 몇몇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15] 한미령(汗未嶺) : 
‘한미령(汗未嶺)’의 ‘未’가 어느 본엔 ‘米’로 되어 있음.
[주-D016] 모두[並] : 
‘모두[並]’가 어느 본엔 빠졌음.
[주-D017] 마륜대(馬輪臺) : 
‘마륜대(馬輪臺)’의 ‘臺’가 어느 본엔 ‘峙’로 되어 있음.
[주-D018] 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19] 경계[界] : 
‘경계[界]’가 어느 본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20] 경계[界] : 
‘경계[界]’가 몇몇 본들엔 ‘路’로 되어 있음.
[주-D021] 좌수영(左水營) : 
전라도(全羅道) 여수(麗水)에 두었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과 경상도 동래(東萊)에 두었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통칭.
[주-D022] 4,481 : 
‘4,481’이 어느 본엔 ‘4,482’로 되어 있음.
[주-D023] 석성(石城) : 
‘석성(石城)’이 몇몇 본에는 ‘石築’으로 되어 있음.
[주-D024] 석성(石城) : 
‘석성(石城)’이 어느 본엔 ‘石築’으로 되어 있음.
[주-D025] 석성 : 
‘석성(石城)’이 어느 본엔 ‘石築’으로 되어 있음.
[주-D026] 석성(石城) : 
‘석성(石城)’이 어느 본에 ‘石築’으로 되어 있음.
[주-D027] 하나의 길이 될 뿐이다[只爲一路] : 
‘하나의 길이 될 뿐이다[只爲一路]’의 ‘爲’가 어느 본에는 ‘有’로 되어 있음.
[주-D028] 석축 : 
‘석축(石築)’의 ‘築’이 어느 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029] 석성 : 
‘석성(石城)’의 ‘城’이 어느 본에는 ‘築’으로 되어 있음.
[주-D030] 동해방(東海防) : 
‘동해방(東海防)’의 ‘防’이 어느 본에는 ‘舫’으로 되어 있음.
[주-D031] 유 도독(劉都督) : 
?~1619년. 명나라 장수. 자는 자신(子紳), 호는 성오(省吾). 임진란(1592년) 때 서울이 함락되자 이듬해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원군으로 왔으며, 다시 원병 요청에 유 도둑은 5,000의 군사를 이끌고 왔고 정유재란(1597년) 때 우리의 요청에 의해 다시 입국했다. 1618년에 요동을 칠 때 좌도독으로 참전했으나 전사하였다.
[주-D032] 외적[賊] : 
‘적(賊)’이 몇몇 본에는 ‘敵’으로 되어 있음.
[주-D033] 황진(黃進) : 
?~1593년(선조 26). 자는 명보(明甫), 호는 아술당(蛾述堂), 본관은 장수(長水).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1591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서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을 예언했다. 임진란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끝내는 진주성(晋州城)을 고수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좌찬성에 추증.
[주-D034] 역대병요(歷代兵要) : 
인본 13책. 군담(軍談)을 엮은 책으로, 세종 때 이석형(李石亨)ㆍ조매(趙枚)ㆍ송임명(宋林明)이 공편한 책으로 중국 상고에서부터 이조 태조 때까지의 흥미있는 전쟁기사를 모은 것이다. 1455년(세조 1)에 간행.
[주-D035] 있으며[在] : 
‘있으며[在]’가 몇몇 본에는 ‘此’로 되어 있음.
[주-D036] 양마성(羊馬城) : 
성 앞에 쌓은 작은 성(城).
[주-D037] 정남(正南) : 
‘정남(正南)’의 ‘正’이 원본 및 몇몇 본에는 ‘面’으로 되어 있는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거하여 ‘正’으로 고쳤음.
[주-D038] 지세(地勢) : 
‘지세(地勢)’의 ‘勢’가 몇몇 본에는 ‘形’으로 되어 있음.
[주-D039] 적(敵) : 
‘적(敵)’이 어느 본엔 ‘賊’으로 되어 있음.
[주-D040] 성첩(城堞) : 
‘성첩[堞]’의 ‘堞’이 어떤 본들에는 ‘牒’으로 되어 있음.
[주-D041] 삼별초(三別抄) : 
고려 때 최씨 집권 시대의 사병(私兵). 처음 최우(崔瑀)가 도둑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했으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좌별초ㆍ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고에 포로됐던 이들 중 도망해 돌아온 자를 조직하여 신의 별초를 만들었다. 최씨의 무인정치의 몰락과 함께 해체되었다.
[주-D042] 상처를 동여매고[裹瘡] : 
‘상처를 동여매고[裹瘡]’의 ‘瘡’이 어느 본엔 ‘勢’로 되어 있음.
[주-D043] 글안 : 
몽고계의 한 부족. 10여 계의 부족집단으로, 당(唐), 고구려, 돌궐 사이를 전전하며 이들에게 예속하였으나 당에 복속하고부터 차츰 결합하여 요련 씨(遙輦氏) 집단으로 바뀌자 당의 굴레를 벗어나 글안제국 즉 요(遼)의 기반을 잡았다. 이들은 고려에도 3번이나 침입하였는데, 현종(1010년) 때 40만 대군으로 침범한 것이 두 번째 침략이었는데, 이때 개성이 함락되어 왕 현종은 나주로 피난했다가 드디어 굴욕적인 화친을 하였다.
[주-D044] 선적봉(仙迹峰) : 
‘선적봉(仙迹峰)’의 ‘迹’이 다른 본에는 ‘跡’으로 되어 있음.
[주-D045] 추측할 수 없으나[莫測] : 
‘추측할 수 없으나[莫測]’의 ‘測’이 몇몇 본들에는 ‘側’으로 되어 있음.
[주-D046] 세 문[三門] : 
‘세 문[三門]’의 ‘門’의 어떤 본에는 ‘面’으로 되어 있음.
[주-D047] 적(敵) : 
‘적(敵)’이 어느 본에는 ‘賊’으로 되어 있음.
[주-D048] 강항(姜沆) : 
1567년(명종 22)~1618년(광해군 10).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본관은 진주. 정유재란 때 참전 군량보급에 힘썼고, 의병으로서 싸우다가 이순신의 휘하에 들려고 가던 중 왜구에 포로되었다. 왜국의 군사, 지리의 정보를 적어 인편으로 보내왔다. 일본에 포로된 중 그들에게 성리학을 전해주어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됨.
[주-D049] 저절로 튼튼[自固] : 
‘저절로 튼튼[自固]’의 ‘固’가 어느 본엔 ‘保’로 되어 있음.
[주-D050] 이시직(李時稷) : 
1572년(선조 5)~1637년(인조 15). 자는 성유(聖兪), 호는 죽창(竹窓), 본관은 연안(延安). 이괄(李适)의 난 때에 공주(公州)에 왕을 호송했고, 장악원정, 사복시정, 봉상시정을 역임했다. 병자호란 때 강화가 함락되자 거기서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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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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