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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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림동-약사암藥寺庵
    약사암藥寺庵 : 광주 지한면(池漢面)의 운곡리(雲谷里)에 있다. 현 동구 운림동이다. 약사암, 약사사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09 | NO.12
  • 운림동-증심사證心寺
    증심사證心寺 : 광주 지한면(池漢面)의 운곡리(雲谷里)에 있다. 현 동구 운림동이다. 증심사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7-06 | NO.11
  • 운수동-운수점雲水店
    운수점雲水店 : 광주 소지면(所旨面)의 운수리(雲水里)에 있는 주막명(酒幕名)이다.  현 광산구 운수동이다. 운수 땅이름이 있다. -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18 | NO.10
  • 유계동-원우점園隅店
    원우점園隅店 : 광주 동각면(東角面)의  본촌리(本村里)에 있는 주막명(酒幕名)이다. 현 광산구 유계동이다. 원모랭이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18 | NO.9
  • 유촌동-정자점전천亭子店前川
    정자점전천亭子店前川 : 광주 내정면(內丁面)의 주막명(酒幕名)이다. 신촌리(坪村里)에 있다. 현 서구 유촌동이다. 시암정자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25 | NO.8
  • 인암동-선암역仙巖驛
    선암역仙巖驛 : 광주 소지면(所旨面)의 선암리(仙巖里)에 있다. 현 광산구 인암동이다. 선암역 땅이름이 있다. - 朝鮮地誌資料(1910)
    2020-05-18 | NO.7
  • 입암동-좌구점坐狗店
    좌구점坐狗店 : 광주 효우동면(孝友洞面)의 도동리(都洞里)에 있는 주막명(酒幕名)이다. 현 남구 입암동이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29 | NO.6
  • 지평동-작천점鵲川店
    작천점鵲川店 : 광주 삼가면(三加面)의 운평리(雲坪里)에 있는 주막명(酒幕名)이다.  한글로 간치내쥬막이다. 현 광산구 지평동이다. 깐치내, 작천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23 | NO.5
  • 최승효 가옥
    최승효 가옥은 원래 최상현의 가옥이다. 이 가옥은 독립역사로서뿐만 아니라 한말 전통가옥의 이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으로도 의의가 큰 구조물이다.이 건물은 800평의 부지 위에 정면 8칸, 측면 4칸의 매우 큰 규모의 전통가옥이다. 일자형 평면의 팔작지붕이면서도 우측의 경사진 부지를 자연 그대로 이용해 1퇴(退)공간의 반지하층을 구성하고 있다. 좌측으로도 1퇴를 개방, 공간으로 주어 비대칭의 평면과 입면을 형성해 단조롭지 않게 했다. 최상현 가옥은 최상현의 둘째 아들 최정엽이 물려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거주했다. 최정엽이 1977년 사업을 하는 지인을 돕고자 은행 담보로 보증을 서주었던 일로 최승효에게 매매했다. 이에 최승현 가옥은 오늘날 최승효 고택으로 ‘양림동 최부잣집’이라 불리고 있다. 최승효 가옥은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2호로 지정돼 있다. 
    2020-04-08 | NO.4
  • 화암동-임정林亭
    임정林亭 : 광주 상대곡면(上大谷面)의 주막명(酒幕名)이다. 한글로 슙정이이고 신촌리(新村里)에 있다. 현 북구 화암동이다. 숲쟁이 땅이름이 있다.- 朝鮮地誌資料(1910)
    2020-06-23 | NO.3
  • 화정동-화담사
    화담사(花潭祠) [사당] 송정 남쪽에 있는 사당. 문경공 정희, 정초, 정수충, 민제장 등을 배향하고  고종 5년(1868)에 헐리었다가 그 뒤 다시 세움.
    2019-07-08 | NO.2
  • 흥학관
    흥학관은 일제 강점기 광주 청년학생들의 애국계몽 교육공간이자 독립운동 산실이었다. 그런데 일부 고령자를 제외하곤 흥학관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드물다. 광주의 3·1운동과 학생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우리 역사에 중요한 장소임에도 표지석 하나 없이 수십년을 지나면서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흥학관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밝혀진 바가 없다. 여러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대략 1912년 전후로 추정된다. 흥학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1924년 발간된 《광주읍지》의 ‘학교’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는 “흥학관은 서광산정(서광산정)에 있는 학관으로 최명구씨가 여러 청년들의 수양을 위해 이 집을 건립하였다”라고 기록됐다.흥학관의 시작은 광주 최부자로 알려진 최명구(1860~1924)가 자신의 셋째 아들인 최종수(1894~1940)를 위해 내준 공간이었다. 당시 광주공립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등학교)의 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던 최종수는 이 공간을 광주독립단체의 본 거처이자 청년문화의 산실로 활용했다.당시 광주공립보통학교는 광주운동의 원조격 이라 할 수 있다. 청년단체가 전무하던 시기 민족적 감정을 부흥시키며 신문·잡지 발행, 강습회, 토론회, 강연회, 정구·축구·야구 등 체육 장려를 통해 흥학관을 활용했다. 흥학관에는 사립보통학교와 고등과 강습소, 여성야학교 등이 있었고 장학금과 도서, 학용품 등이 제공돼 인재양성의 장이 됐다.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왕재일은 흥학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흥학관 야학에서 공부해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했다고 회고했다. 성진회 회원들을 비롯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은 흥학관에서 열린 강연을 듣고 민족의식을 깨쳤고, 애국애족 정신을 길렀다.최명구는 1921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잔치를 대신해 그 비용으로 건물을 세웠던 것이다. 최명구는 공익사업이라면 두말없이 땅을 내놓았는데 이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흥학관이다. 200여 평 규모의 흥학관은 일본식 단층 목조건물이다.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당과 소규모 강의실, 여러 개의 온돌방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온돌방에서 숙식하며 배움을 이어가는 청년들도 있었다고 한다. 최명구는 당시 1921년 1만 원의 거금을 흔쾌히 내놓아 널리 쓰일 수 있도록 했다.당시 동아일보에는 1921년 3월 26일 자 4면에 ‘진정한 사회사업자가 나타나다’라는 제목으로 흥학관 낙성식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최명구는 이날 200여 평의 부지에 새 건물을 지어 광주민 300여 명을 초대해 낙성식을 거행했다. 1924년 최명구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 최상현(1881~1945)이 1942년까지 이곳을 운영했다.최상현은 일제 말, 흥학관의 건물과 부지를 광주시에 기부했고, 해방 전까지 광주식량배급조합 사무실로 사용됐다. 정부 수립 후부터 제2공화국 때까지는 광주시의회의 의사당으로도 쓰였다. 흥학관이 있었던 광주 동구 광산동 100번지가 국가보훈처에 의해 국내 항일운동사적지로 지정돼 그 위치만 짐작게 할 뿐이다.1960년대 광주시청이 광산동에서 계림동으로 옮기면서 건물이 철거돼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초등학교를 연상시킬 만큼 넓은 대지는 현재 10여 개로 쪼개져 상업건물이 들어서 있다.흥학관은 1942년 4월 일제에 의해 동일은행에 강제 합병된 민족계 거대 은행 호남은행과 함께 광주에서 가장 오랫동안 조선인들에 의해 운영된 기관이다. 하지만 흥학관은 광주시청 이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20-04-08 | 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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