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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하진보(河晉寶, 1530~1585)

내암집 제12권 / 행장(行狀)

사간(司諫) 하공(河公) 행록〔司諫 河公 行錄〕 남을 대신하여 지었다.


먼 조상 하공신(河拱辰)은 고려에 벼슬하여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냈으며 거란(契丹)에 사신으로 가서 굽히지 않고 죽어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에 추증되었다. 고조부 휘 기룡(起龍)은 통덕랑(通德郞)으로 통례문 통찬(通禮門通贊)을 지냈다. 증조부 휘 유(鮪)는 창신교위로 충무위 부사과(彰信校尉行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조부 휘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안주 목사(安州牧使)를 지냈다. 부친 휘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었다. 모친은 함종 어씨(咸從魚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낸 득강(得江)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경인년(1530, 중종25) 6월 4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였고 기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남달리 총명했다. 책을 읽을 때는 채 세 번을 읽기도 전에 문득 외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임자년(1552, 명종7)에 부친상을 당했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가, 천거를 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봉교(奉敎), 대교(待敎)가 되었으며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 사서(司書)가 되었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병조 좌랑으로 있으면서 동지사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는데, 공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역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중국인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사신 갔다 돌아와서 사헌부와 사간원을 두루 거쳤으니 곧 정언, 지평, 헌납, 장령 등이었다. 각 조를 두루 거쳤으니 곧 병조, 예조, 형조의 좌랑과 정랑이었다. 성균관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이었으니 사성, 사예, 전적 등이다. 재상어사(災傷御史)로 차출된 것이 네 번이었으니 관동, 호서, 호남 등이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친 것은 모두 계해년(1563, 명종18) 이후지만 날짜의 앞뒤는 살펴볼 수가 없다.

정묘년(1567, 선조 즉위년) 가을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경오년(1570, 선조3)에 파직되었고, 임신년(1572, 선조5)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조정에 들어가 종부시 정(宗簿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이 되었으며, 이윽고 장령이 되었다가 체차되어 사예가 되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을해년(1575, 선조8) 가을에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자년(1576, 선조9) 겨울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고 정축년(1577, 선조10)에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가, 추국경차관(推鞠敬差官)으로 충청도 음부옥사를 처리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사예가 되었다가 우통례로 옮겼는데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가을에 김해 부사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578, 선조11) 겨울에 사간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중도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기묘년(1579, 선조12) 겨울에 밀양 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임오년(1582, 선조15) 여름에 남천(南川)의 배가 파선하는 바람에 체직되었는데, 밀양의 선비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성을 에워쌌다. 성문을 밖에서 봉쇄한 지 한 달이 넘자, 그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 그대로 두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어떤 일로 파직당해 돌아왔다. 내직과 외직에 제수된 것이 모두 겸춘추(兼春秋)였다. 만년에 또 홍문관에 천거되어 을유년(1585, 선조18)에 좌통례에 제수되었으나 임금의 명이 이르기 전에 졸하였으니 10월 15일이었다. 향연 56세였다. 다음해 2월 7일에 오곡(烏谷)의 달호음산(達好音山) 선영 옆 감좌(坎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공은 덕성이 너그럽고 중후하였으며 풍채가 빼어났다. 평소에 다급한 말과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우애는 타고나서 아무도 이간하는 말이 없었다. 훌륭함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시비를 가리는 일에는 마음속으로 엄격했다. 다른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은 좋아하였으나 불선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가 대관(臺官)으로 있을 때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하자 남명 선생이 서신을 보내 치하하였다. 또 부사 하정(河珽)의 원한을 논하여 풀어주었는데, 하정은 기묘사화 때에 김식(金湜)을 숨겨주었던 사건으로 인해 죽음을 당하여 오래도록 신원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벼슬에 있을 때는 청렴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폐정을 힘써 없앴다. 은혜와 사랑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니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에 간직하였고, 엄격하고 분명하게 관리들을 부리니 벼슬아치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장부와 문서가 구름처럼 쌓여도 물 흐르듯 처리하였고, 송사를 결단할 때는 반드시 공정한 도리를 따랐으며 작지(作紙)에는 곤장을 치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 더욱 마음을 쏟아 권면하고 인도하는 데 힘썼으며, 양로연을 베풀 때는 반드시 직접 술잔을 잡고 술을 따랐다. 봄가을 석전(釋奠)과 사직단, 성황당 등에 제사지낼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행했다.

의복에 쓸 옷감이나 면포를 준비할 때는 반드시 하인에게 명하여 집안의 곡식과 바꿔오도록 하였고 벼슬아치들에게 처리하라고 맡긴 적이 없었다.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매우 박하였으나 친족이 궁핍한 경우에는 온힘을 다해 도와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그가 일족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칭송하였다.

성주 창고의 곡식이 거의 삼십만 석이었는데, 계속 썩어서 명목으로는 남아 있으나 실제로는 남은 것이 없었기에 백성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공이 곧 창고의 곡식을 풀어 헤쳐서 둘로 나눈 다음, 반은 그대로 쓰고 나머지는 모곡(耗穀)으로 원래 숫자를 채웠다.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비석을 세우기로 하였다가 배덕문(裵德文)의 저지를 당했는데, 배덕문은 토호(土豪)로서 일찍이 공의 제제를 받았던 사람이다.

김해부에는 포흠(逋欠)이 많았기 때문에, 오래 누적되고 징수하기 어려운 것을 골라서 그 문서를 모두 태워버린 다음 소비를 줄여서 그 숫자를 채웠다. 그래서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밀양(密陽)에 부임했을 때는 민간에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이 있었다. 밀양부 안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었는데 사대부 집안 여자들이 다투어 몰려들어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기도를 올리곤 했다. 공이 신상을 끌어내어 강에 빠트리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요사스런 귀신이 마침내 제거되고 오랜 악습이 모두 혁파되었다.

또 소송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겨서 부인들이 송정(訟庭)에 자주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염치를 가르쳐서 깨우쳐주니 부끄러움을 알고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일 년이 채 못 되어 이런 폐단이 없어졌다. 사직단과 성황당의 위판은 관청에 줄을 세워두었는데 너무 더러워졌기에 공이 단 옆에 집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또 바깥에 재실을 지어서 제사지내는 장소로 삼았는데, 그가 떠나자 역시 비석을 세우고 그 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벼슬길에 있을 적에, 도를 굽혀 진급하려 하지 않았고 구차하게 현달을 바라지도 않았다. 공의가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아 자급을 올려주려고 동부승지와 동래부사에 천거하였지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했다. 지위가 덕에 걸맞지 않아 끝내 당하관에 머물렀으니 운명이었다. 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있을 때는 날마다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한 집안을 화목하게 했다. 술이 있으면 서로 자기가 거르겠다고 하면서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간혹 한밤중이 되어서야 끝나기도 했으며 비바람이 몰아쳐도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우애의 돈독함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수우당 최영경 선생과 가장 밀접하게 교유하였으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선생이 달려와서 병문안을 하고 약을 썼으며, 돌아가시자 직접 염을 하고 안치하였는데 애도와 예의를 빠짐없이 갖추었다. 본가에 관으로 쓸 판목이 없어서 선생이 관과 곽으로 쓸 재목을 부의로 내었고 장례를 지낼 때 또 산소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지냈으니, 평소에 서로 어울렸던 마음을 알 수 있다.

성주와 밀양 두 고을의 향교, 서원, 향소에서 각각 교생, 원생, 품관 등을 보내 글을 지어 조문하고 제사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또 부의까지 드렸으니 오래 될수록 잊지 못하는 뜻 역시 상상할 수 있다.

공의 첫째 부인은 이공도(李公度)의 따님 전의 이씨로, 진사 이정윤(李貞胤)의 손녀였다. 자녀를 낳았는데 모두 요절하였다. 둘째 부인은 본관이 진주인 선전관 정수익(鄭受益)의 딸이자 수사(水使)를 지낸 정은부(鄭殷富)의 손녀였는데,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남편은 정연(鄭沇)이다. 셋째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辛氏) 신여근(辛汝謹)의 딸이자 광주 목사(光州牧使) 신륜(辛崙)의 손녀인데 딸 하나를 낳고 요절하였다. 부실이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딸은 요절하였고, 아들 신동인(辛同寅)은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었다.

[주-D001] 하공(河公) : 

하진보(河晉寶, 1530~1585)로, 본관은 진양, 자는 선재(善哉), 호는 영모정(永慕亭)이다.

[주-D002] 재상(災傷) : 

수재ㆍ한재, 또는 풍해ㆍ병충해로 인해서 발생한 곡식의 피해를 말한다.

[주-D003] 남천(南川) : 

현 경상남도 밀양시의 밀양강이다.

[주-D004] 겸춘추(兼春秋) : 

각 고을의 문관 수령(文官守令)이 춘추관(春秋館)의 수찬관(修撰官) 이하 관직을 겸임(兼任)한 경우에 일컫는 말이다.

[주-D005] 달호음산(達好音山) : 

현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월아산(月牙山)이다.

[주-D006] 윤원형(尹元衡) : 

?~1565.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언평(彦平)이다.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이다. 1533년(중종28)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소윤(小尹)의 우두머리로 1545년(인종1) 을사사화를 일으켜 대윤(大尹)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집권했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배경으로 대윤 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개시하고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집권 20년 만인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관작을 박탈당하고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강음(江陰)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주-D007] 김식(金湜) : 

1482~1520.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중종14) 현량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성에 이르렀다.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는데 거창으로 피했다가 자결했다.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저술로 《사서집》이 있다.

[주-D008] 작지(作紙) : 

조세를 거두어 창고에 넣는 과정에서 그 장부를 꾸밀 때 쓰는 종이, 또는 명부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

[주-D009] 모곡(耗穀) : 

환자(還子) 곡식을 받을 때, 곡식을 쌓아둘 동안 축이 날 것을 미리 짐작하고 한 섬에 몇 되씩을 덧붙여 받던 곡식을 말한다.

[주-D010] 배덕문(裵德文) : 

1525~1603.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숙회(叔晦), 호는 서암(書巖)이다. 임진왜란 때 창의하였다. 저술로 《서암선생실기》가 있다.

[주-D011] 포흠(逋欠) : 

관물(官物)을 사사로이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2] 술이 …… 거르겠다고 :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3] 화락한 모습으로 즐거워했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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