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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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옥ㆍ김덕령의 사우에 대하여 사액하는 건 - 서원등록(書院謄錄)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의 사우(祠宇)에 대하여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여 사액하는 건 - 숙종(肅宗) 6년(1680) : 서원등록(書院謄錄)

윤8월 25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이번 윤8월 24일 주강(晝講)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동지사(同知事)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신이 광주(光州)에서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광주의 백성들이 전송(傳誦)하는 말을 듣고 또 초야(草野)에 기록되어 있는 글을 참고해 보니, 광주 사람 박광옥(朴光玉)은 바로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때의 사류(士流)입니다. 문과(文科) 출신으로 대관(臺官)과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언사(言事)를 올리고는 귀국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같은 고을 사람인 고경명(高敬命) 등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노병(老病 늙어 쇠약해져서 생기는 병)이 깊어서 종군하지는 못하고 집에서 응접(應接)하고 모병(募兵)하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일을 하고 규획(規劃)한 바가 많았는데,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덕령(金德齡)도 광주 사람인데, 그의 사적(事蹟)은 더욱 뛰어납니다. 그가 지닌 절륜(絶倫)의 용맹과 해를 꿰뚫을 충성심 그리고 하늘에 닿을 원통함은 온 세상 사람들이 송(宋)나라 때 악비(岳飛)에 견줍니다. 그 당시 원통하게 죽은 상황에 대하여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여 대신들과 논의하여 원통한 것을 풀어주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습니다.’고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은 어찌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고 칭한 것인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민서가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이미 그 기록을 보셨으니, 그 사람의 생애에 대하여서는 상세하게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박광옥은 일찍이 고을 사람들이 사당(祠堂)을 세워서 제향(祭享)하였고, 김덕령은 추후에 병향(並享)하여 그 사우를 의열사(義烈祠)라고 하였는데, 당시에는 사액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문무(文武)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충의(忠義)의 절개는 모두 한 시대에서 나온 것이니, 조정에서 마땅히 포장(褒奬)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해야 합니다.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게 하여서 특별히 사액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액(賜額)하라.’고 전교(傳敎)하였습니다.
대신들에게 논의하게 하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이 공무를 본 이래로 장로(長老)가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 모두 김덕령이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사적과 원통하게 죽은 사실을 칭송하였습니다. 박광옥 경우에도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듣기는 하였으나, 여태껏 상세한 사행(事行)을 듣지 못하였는데, 지난해에 영남(嶺南)으로 내려가서 영남의 인사들과 만나 듣지 못했던 것을 더 듣게 되었습니다. 박광옥이 삼가고 힘써 실천하여 선배들에게 추중(推重)을 받고, 학도(學徒)를 모아 학문을 강하여 후생들에게 공(功)이 있었습니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또 의병들을 불러 모았으니, 사림들이 존숭하고 흠모하여서 향사(享祀)하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김덕령의 경우에는 생전에 충효(忠孝)와 대절(大節)이 있었고, 또 아주 뛰어난 용맹을 겸비하여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25)의 난리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왜적과 싸워 큰 공로를 세우지는 못하였으나, 왜적들이 그의 이름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벌벌 떨면서 감히 기세를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사람을 보내어 몰래 그의 형상을 그려 오게 하여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왜적들이 갑자기 병사들을 거두어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모두 날뛰며 서로 기뻐하였으니, 그의 위명(威名)이 대단히 떨쳐졌던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功)을 세우기도 전에 죄 없이 죽자, 나라 안의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면서 송나라의 악비에 견주었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원통함을 풀어주고 거듭 관작을 추증하여 호남(湖南)의 인심(人心)을 크게 위로하니, 김덕령의 풍성(風聲)과 의열(義烈)이 사람들에게 칭송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관작을 추증하여 조정에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뜻을 보인 것은 과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고을 사람들이 이미 두 사람을 한 사우에 병향(並享)하였으니, 연신(筵臣)이 진달한 대로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는 것이 진실로 충절을 드러내고 선(善)을 표창하는 도리에 합당하여 따로 더 의논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裁決)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 때 신축년(辛丑年, 1601, 선조34)에 호남(湖南)에서 염문(廉問)하도록 명령을 받아 오랫동안 광주에 머무르며 유생(儒生)ㆍ부로(父老)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김덕령의 일을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팔에 불끈 힘을 주고 매우 슬퍼하며 비탄에 잠겼습니다. 신이 이에 비로소 김덕령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 출중한 지략과 용맹은 진실로 세상에서 흔하지 않으며, 옛날의 열렬(烈烈)한 장부(丈夫)라고 하는 자들과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난리를 만나서 몸을 떨쳐 의병을 일으켰으나, 공은 세우지 못하고 명성만 날로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이름은 존숭을 받았으나, 몸은 참화(慘禍)를 당하여 원통함을 품고 저승에서 지낸 지 70년이 되었습니다. 신이 당시에 인심(人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임금께 아뢰었는데, 당시에 아뢴 것을 항상 부끄러워하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후에 원통한 사정을 아뢰는 자가 있어서 비로소 포증(褒贈)의 은전(恩典)을 시행하게 되어, 한편으로는 인심(人心)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박광옥의 경우에는 신이 비록 그의 인물됨에 대하여 여전히 논하지 못하였으나, 그가 학문을 닦고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한 것은 이미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그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은 후생(後生)들에게 충분히 모범이 될 만합니다. 이처럼 그가 수립한 경지는 사당에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는 아니 됩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을 병향한 사우에 의열(義烈)이라는 칭호를 더해 주는 것이 진실로 두 사람의 행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은액(恩額)을 하사하여 임금께서 숭상하고 장려하는 성덕(盛德)을 보여 주심이 진실로 사리(事理)에 마땅합니다. 삼가 임금께서 재결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右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김덕령이 화를 입은 지 이미 백 년이 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그의 풍문(風聞)을 들은 자는 비록 어린아이와 아녀자라 할지라도 모두 원통해하니, 영남의 인사들만이 감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충용(忠勇)한 절개는 충분히 후세 사람들을 흥기시킬 수 있으며,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실로 뛰어난 충성심과 용맹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를 송나라의 악비에 견준 것은 매우 안타까워서 슬퍼하는 말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그를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하여 저승에 있는 원혼을 위로하고, 매우 원통해하는 인심(人心)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은 여전히 씻어내기 어려우니, 그가 나라를 위하여 바친 충성을 숭상하고 장려해야 할 것입니다. 박광옥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늙기도 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고, 후생(後生)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았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병을 일으켜서 국가를 위하여 왜적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그의 생애를 궁구해 보면, 다만 한 고을만의 훌륭한 선비가 아니니, 제사를 지내는 일은 참으로 과람(過濫 분수에 넘치는 데가 있음)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임진왜란 때의 일을 생각해 보면, 선조께서 중흥의 업을 이룩할 때, 진실로 호남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선비들에게 힘을 입은 바가 있었으니, 성조(聖祖)께서 인재를 배양하신 효과가 더욱 중흥의 성대한 공업(功業)에 빛이 났던 것입니다. 지금 김덕령과 박광옥 등을 병향한 사우에 직질(職秩)을 더하고 편액(扁額)을 내려주어 여러 대에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을 거행하여, 한 도(道)의 오랜 숙원(宿怨)을 위로해 주시는 것이, 진실로 포숭(褒崇)하고 권면(勸勉)하는 떳떳한 일에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임금의 재결을 바랍니다.’고 하였습니다. 좌의정(左議政) 정지화(鄭知和)는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들의 뜻이 이와 같으니, 임금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贈職)하고 사액(賜額)하여 포장(褒獎)의 뜻을 보이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주-D001] 주강(晝講) : 
조선 시대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 이하가 오시(午時)에 임금을 모시고 법강(法講)을 행하던 일로서, 주강 외에도 조강(朝講)과 석강(夕講) 등이 있음.
9월 초9일
박광옥(朴光玉)ㆍ김덕령(金德齡)을 병향(並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건
예조(禮曹)의 단자(單子)에, “광주(光州)의 박광옥(朴光玉)과 김덕령(金德齡)을 합향(合享)한 사우(祠宇)에 사액(賜額)하는 일을 대신들과 논의하여 이미 계하(啓下)를 받았습니다. 교서(敎書)와 액호(額號)를 전례대로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짓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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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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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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