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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학유 고공(고인후)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 -문곡집

권지학유 고공의 시호를 청하는 행장〔權知學諭高公請諡行狀〕 -문곡집 제22권 / 행장(行狀) : 김수항(金壽恒, 1629~1689)

본관은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이다. 증조는 휘(諱) 운(雲)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 맹영(孟英)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으며,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 경명(敬命)으로, 호(號)는 제봉(霽峯)이다.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지제교(知製敎)를 지냈으며,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공은 휘 인후(因厚)로, 자(字)는 선건(善建)이고, 자호(自號)는 학봉(鶴峯)이다.

고씨(高氏)는 본래 탐라(耽羅)에서 나왔는데, 공의 선대가 장흥(長興)을 본적으로 하사받아 마침내 장흥 사람이 되었다. 충렬공은 일찍이 문장으로써 세상에 명성을 떨쳤고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끝내 충절(忠節)로써 크게 드러났다. 울산 김씨(蔚山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제학(副提學)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며, 장부(丈夫)인 아들 여섯을 두었다. 공은 그 가운데 둘째로,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민첩하고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3세에 글자를 알았고, 6세에 처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일취월장하였다. 또 뜻이 고상하고 원대하여 여러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 때 사상견례(士相見禮)를 설행했는데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는 것이 엄숙하게 법도에 들어맞았으니, 장로들이 보고서 남다르게 여겼다.

성장해서는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고 지조와 행실에 독실하게 힘썼다. 장가들고 나서 처가가 본디 재산이 넉넉하여 공을 매우 후하게 대접했는데, 공은 화려하고 사치스런 의복이나 일용품을 일체 거절하고 검소함으로써 자신을 신칙하며, 밤낮없이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만 부지런히 힘을 다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는데, 당시 나이가 겨우 17세였다. 기축년(1589)에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의 의논이 공의 문학으로는 한원(翰苑 예문관)이나 호당(湖堂)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앞다투어 천거하고자 하였다. 당시 충렬공이 요직에 있는 자에게 꺼림을 당했는데, 이로 인해 아울러 공까지 배척하여 성균관 권지학유(成均館權知學諭)로 축출해서 보임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와해되어 왜적들이 마침내 멀리 북쪽까지 쳐들어가는데도 그 칼날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당시 호남(湖南)의 관찰사(이광(李洸))는 변고를 듣고 위축되어 근왕(勤王)할 뜻이 전혀 없었는데, 충렬공은 공의 형제와 함께 바야흐로 광주(光州)의 고향에 은거하고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달려가 국난을 구하기로 의논하였다.

관찰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비로소 군대를 거느리고 행차가 금강(錦江)에 이르렀는데, 어가(御駕)가 서쪽으로 거둥했으며 경성(京城) 또한 사수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급작스럽게 진(陣)을 해산시키고 돌아가자, 온 도내의 인심이 더욱 흉흉한 채 안정되지 못하였다. 급기야 재차 병사를 징발하자,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곳곳마다 도망쳐 숨어 버렸다.

충렬공이 박광옥(朴光玉)과 함께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효유하여 본주(本州 광주)의 흩어진 병졸들을 수습하고, 공과 공의 백씨(伯氏) 임피공(臨陂公 고종후(高從厚))에게 군대를 나눈 다음 수원(水原)에 이르러 목사(牧使) 권율(權慄)에게 군대를 넘겨주도록 했다. 이어 서쪽의 행재소로 달려가려 했으나 길이 막혀 나아갈 수가 없었다. 돌아와 담양(潭陽)에 이르니, 충렬공이 이미 의병의 깃발을 세워 대장이 되었다. 공이 임피공과 실로 충렬공을 따랐다.

장차 완산(完山 전주(全州))으로 군대를 옮기려 할 적에 한 사인(士人)이 “내게 늙은 어머님이 계시니 돌아가 어머님을 뵙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뒤따라 계원장(繼援將)에 소속되고자 합니다.”라고 청하자, 공이 분개하여 “저 사람은 참형(斬刑)에 처해야 옳다. 사람들 모두 떠나려고 한다면 어떻게 군대를 유지하겠는가.”라고 하니,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였다. 완산에 주둔할 적에 충렬공이 공에게 휘하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진안(鎭安)과 무주(茂朱)의 경계에 매복한 다음 영남(嶺南) 쪽 왜적들의 침범을 막게 했는데, 얼마 뒤에 왜적들이 무주에서 다시 영남으로 향하였다.

충렬공이 비로소 병사들을 정비하여 북상할 계획을 세우고 여산(礪山)으로 나아가 주둔하며 이에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 관서(關西 평안도)에 이르게 하였다. 호서(湖西)의 경계에 다다랐을 때 또 황간(黃澗)과 영동(永同)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쳐들어왔는데 기세가 더욱 사나워 완산이 머지않아 위급해지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충렬공이 휘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여 먼저 금산의 왜적들을 공격해서 본도(本道)를 구하고자 마침내 병사들을 진산(珍山)으로 이동시켰다.

전사 가운데 모집에 응한 자들이 점점 많아져 이에 장수와 병졸들을 부대로 나누었다. 공을 선봉으로 삼아 금산에 이르러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영(營)을 나누어 좌우익(左右翼)으로 만들었다. 의병이 먼저 전투를 독려하여 적병을 토성으로 몰아넣고 사방에서 공격하며 에워싸자 왜적들이 많이 죽거나 다쳐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기꺼이 전투를 돕지 않았기에 바로 군대를 퇴각시켜 진(陣)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의병과 방어군(防禦軍)이 함께 전투에 나가 미처 교전하지도 못했는데 왜적들이 성벽을 뚫고 나와 먼저 관군을 공격하자, 방어사의 여러 군사들이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 먼저 궤멸되었고, 의병 또한 따라서 궤멸되었으며, 충렬공은 왜적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공은 항상 선두에 있으면서 무사(武士)들을 이끌고 격려했는데, 군사들이 궤멸되자 말에서 내려 부대의 대오를 정리하고 다시 전투를 하려다가 결국 진중(陣中)에서 죽고 말았으니, 바로 이해 7월 10일이었다. 남쪽 백성들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목 놓아 울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피공이 승려들에게 청하여 공의 시신을 찾아 염(殮)했는데, 죽은 지 이미 40여 일이 지났는데도 낯빛이 산 사람 같았다.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창평현(昌平縣) 수곡리(壽谷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처음에 선조(宣祖)께서 공(公)의 부자가 전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우 슬퍼하며 공을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하라는 명을 내렸고, 을미년(1595, 선조28)에 또 유사(有司)에게 정문(旌門)을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 신축년(1601)에 또 고을 사람들이 청을 올렸기 때문에 사당을 세워 충렬공을 제사 지내고 공을 배향하도록 명한 다음 포충(褒忠)이라고 사액(賜額)하였다. 임피공은 상차(喪次)에서 의병을 일으켜 복수하다가 정유년(1597)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공의 누이동생과 사촌 누이동생 또한 왜적을 꾸짖은 다음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충렬공의 서제(庶弟)인 경형(敬兄) 또한 임피공과 함께 죽었다. 세상에서 부자간의 의로운 죽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을 말하는데, 공과 같은 경우는 한집안에서 5, 6명이 앞뒤로 목숨을 바치고 부자와 형제가 모두 충효(忠孝)와 의열(義烈)로써 세상에 드러났으니, 어찌 고금(古今)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부인은 이 부인(李夫人)으로, 감사(監司) 이경(李璥)의 딸이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큰아들은 부림(傅霖)이고, 그 다음은 부천(傅川)으로 문과에 급제했으며 장령(掌令)을 지냈다. 그 다음은 부즙(傅楫)으로 생원(生員)이며, 그 다음은 부량(傅良)으로 진사(進士)이다. 딸은 오희일(吳希一)에게 시집갔다. 첩은 아들이 1명으로 부매(傅梅)이며, 3녀 가운데 큰딸은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첩이 되었고, 그 다음은 참봉(參奉) 장응붕(張應鵬)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참의(參議) 유성증(兪省曾)의 첩이 되었다. 내외 손과 증손이 수십 명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빼어나고 깨끗하며, 의지와 기개가 강개하여 세상의 영욕(榮辱)과 이해(利害)의 득실에 대해서는 욕심이 없어 조금도 그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이 없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충렬공을 섬길 적에 옆에서 부지런히 시중들었으니, 사랑과 공경이 모두 극진하였다.

충렬공이 군(郡)에 부임했을 적에 공이 잠시 가서 뵈었는데 이 부인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충렬공이 공을 바로 돌려보내려 하지 않고 공도 감히 굳이 청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재차 급보(急報)가 있었다. 충렬공이 그제야 서둘러 공을 돌려보냈지만 병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부인이 임종할 적에 여러 어린 자식들을 부탁하자, 공이 애통해하며 “마땅히 아이들을 위한 작은 계책으로 다시는 아내를 두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치고 나서 충렬공이 다시 장가를 들이려 했지만 공이 이러한 자신의 뜻을 말씀드렸기 때문에 충렬공 또한 강요하지 않았다.

소싯적에 정시(庭試)를 보러 들어가 시제(試製)를 보니 바로 공이 이전에 사사로이 지었던 것이어서 꺼려져 선뜻 써서 바치지 못하고 있는데, 친한 벗이 강력히 권하자, 공이 “선비의 입신(立身)은 구차해서는 안 되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자기가 그 글을 사용하기를 청하자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다시 다른 글을 구상하여 쓰기를 겨우 끝냈는데 정해진 시간이 이미 지나 버렸다.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가 공이 지은 글이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까워하며 곡진히 공의 처지를 위하고자 하여 여러 번 말을 했지만 공이 끝내 듣지 않고 오히려 시권(試券)을 접어 소매에 넣은 다음 나와 버리자, 사람들이 모두 혀를 차며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독서를 할 때는 세 번을 넘기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으며, 문장을 지으면 글귀가 아름답고 민첩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3)에 서간이나 격문 같은 여러 글들은 충렬공이 손수 초안을 잡은 것이 아니면 대부분 공의 형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임피공이 공이 쓴 격문 중의 말을 거론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하며 “‘저들이 곧 제멋대로 하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이렇지만 전단(田單)이 제(齊)나라를 돌이킨 것과 같이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미루어 보면 또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군중(軍中)에 있을 적에 공은 보잘것없는 일개 서생(書生)으로 활쏘기와 말 타기는 평소 익힌 것이 아니었지만 몸소 전투에 나가 홀로 한 방면을 맡으며 일찍이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항상 “오늘날의 일이 비록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모두 죽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충렬공이 스스로 옷 위에 성명(姓名)을 적고 공 또한 똑같이 했는데, 이로써 훗날 시신을 찾는 데 증거가 되었으니, 공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한 뜻이 이미 처음에 결정되었음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아! 공이 재주와 행실로 이미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에 출사했으니, 만약 때를 타서 포부를 펼쳤다면 경악(經幄 경연(慶筵))과 사원(詞苑 예문관(藝文館))이 어찌 합당하지 않았겠으며, 세상에 끼친 그 명성과 업적이 필시 당대의 여러 이름난 공들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시론(時論)에 곤액을 당하여 논사(論思)하고 찬술(撰述)하는 자리에서 한번도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들판에서 시신이 되어 자신의 불행을 나라의 영광으로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인조(仁祖)조에 아들 부천이 원종훈(原從勳)에 참여했기 때문에 누차 공을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금상(今上 숙종(肅宗)) 정묘년(1687, 숙종13)에 이르러 호남의 많은 선비들이 대궐문 앞에 엎드려 글을 올려 임피공과 공의 사적을 상세히 진술하며 아울러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자, 임금이 특별히 허락하여 일을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였다.

공의 현손(玄孫)인 응익(應翼)이 여러 부형의 요청으로 내게 행장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록 공의 부자보다 늦게 태어났지만 평소 깊이 사모했기에 이에 감히 비루하고 졸렬함을 헤아리지 않고 삼가 그 가첩(家牒)을 모아 위와 같이 차례대로 엮어 유사(有司)에게 알린다.


[주-D001] 중간에 연좌되어 파출되고 : 
고경명은 명종 때 홍문관 교리가 되었지만, 아버지 고맹영의 죄에 연좌되어 파출되었다가 선조 때 동래 부사가 되었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22년 10월 1일》
[주-D002] 당시 등용에 좌절되었지만 : 
고경명은 동래 부사로 재임 중에 날마다 술을 마시며 직무를 살피지 않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24년 4월 4일》
[주-D003] 제갈첨(諸葛瞻)과 변 성양(卞成陽) : 
제갈첨(227~263)은 촉한(蜀漢)의 장수로, 제갈량(諸葛亮)의 아들이다. 위(魏)나라가 촉한을 공격할 당시 위나라 장수 등애(鄧艾)와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제갈상(諸葛商) 또한 전투 중 전사했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변 성양은 진(晉)나라의 변호(卞壺, 281~328)로, 성양(成陽)은 지명이다. 소준(蘇峻)의 반란 때 전사하고, 아들 변진(卞眕)과 변우(卞盱)가 뒤이어 전사했기 때문에 ‘변문충효(卞門忠孝)’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70 卞壺列傳》
[주-D004] 노중련(魯仲連)처럼 …… 수밖에 : 
노중련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이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있을 적에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포위하면서, 위(魏)나라가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를 천자(天子)로 받들면 살려 주겠다고 하자, 노중련이 진나라는 예(禮)를 버리고 공(功)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느니 동해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趨陽列傳》
[주-D005] 전단(田單)이 …… 것 : 
전단은 제나라의 전씨(田氏) 왕족이다. 연(燕)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 성을 함락했는데, 전단이 즉묵성(卽墨城)을 지켜내 연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제나라를 수복했다. 《史記 卷82 田單列傳》
[주-D006] 금상(今上) …… 명하였다 : 
1688년(숙종14) 3월 7일에 호남 유생들이 청을 올려 고인후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고, 1694년 10월 11일에 고인후에게 의열(毅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국역 숙종실록 14년 3월 7일, 20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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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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