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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남원(南原) 정충사(貞忠祠)의 비문 - 청음집 제29권 :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

만력(萬曆) 계사년(1593, 선조26)에 왕사(王師)가 왜병들을 바닷가에서 크게 무찔러 왜적들의 수괴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깊이 원망하였다. 그해 6월에 자신의 장수인 가등청정(加藤淸正)으로 하여금 정예병을 모두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여 평양성(平壤城)에서의 패전을 갚게 하였는데, 일본 전국의 힘을 이 한 성에 응집시켜서 그 형세가 참으로 바윗덩이로 계란을 억누르는 것과 같았다. 우리 군사들은 하루에 두세 번을 적과 싸우면서 혼자 열 명을 당해 내지 않는 군사가 없어 사기가 백 배는 치솟았다. 그러나 하늘이 순조롭게 도와주지 않아 큰비가 쏟아져 내려 성이 무너진 탓에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성 안에 있던 장사는 모두 죽었는데,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충청 절도사(忠淸節度使) 황공(黃公)이었다.


공은 휘가 진(進)이고, 장계현인(長溪縣人)으로, 고(故) 상신(相臣)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좌의정에 증직된 황윤공(黃允恭)이며, 어머니는 남양 방씨(南陽方氏)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5)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체구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용력(勇力)이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성품은 강직하고 굳세었으며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제를 마치고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제수되었다.


계미년(1583, 선조16)에 죄를 물을 때 반호(叛胡)를 활로 쏘면서 먼저 성에 올라가 공을 세웠다. 안원 권관(安原權管)에 제수되었는데, 자신이 노획한 오랑캐의 수급을 나누어 주어 공을 세워 죄를 씻어야 하는 친구의 죄를 벗겨 주자 사람들이 의롭다고 하였다. 이후 다시 선전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있다가 통신상사(通信上使)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갔는데, 함께 간 일행이 앞 다투어 물품을 사 가지고 와 이문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공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검(寶劍) 두 자루만 구입하였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 까닭을 물으니, “내년에 왜적이 반드시 맹약을 깰 것이다. 나는 그때 이 칼을 써서 섬멸할 것이다.” 하자 공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은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훗날에는 과연 공의 뜻을 보게 되었다.


조정에 돌아오자 상께서 왜적의 사정을 물었는데, 상사인 황윤길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올 것이라고 하였고, 부사인 김성일(金誠一)은 왜적이 반드시 침입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공은 상소를 올려 김성일을 참수하고 수군(水軍)을 양성해 왜적을 방어할 계책을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시의(時議)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제용감 주부(濟用監主簿)와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는데, 날마다 전술을 익히면서 대비하느라 편히 쉬는 날이 없었다.


다음 해에 과연 왜적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어가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 감사 이광(李洸) 등은 용인(龍仁)에서 왜적에게 궤멸되었으나, 공만은 홀로 군사를 온전하게 데리고 돌아와 웅치(熊峙)에서 왜적과 싸웠으며 또 이현(梨峴)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을 크게 무찔러서 호남이 이에 힘입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를 지나갈 때 전주 사람들이 은덕에 감격하면서 호장(壺漿)을 싸들고 와 길을 메웠다. 그러나 막부(幕府)에서 공의 공(功)을 엄폐하여 상이 훈련 부정(訓鍊副正)에 그쳤다.


체찰사가 승제(承制)로 익산(益山)의 임시 군수(郡守)로 삼았는데, 곧바로 정식으로 익산 군수가 되게 하였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가 수원(水原)으로 진격하였을 때 공은 척후(斥候)로 나갔다가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적중에 좋은 말을 탄 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이 일이 보고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되어 충청 조방장(忠淸助防將)에 제수되었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전라 병사로 승진하였다. 이때 경성(京城)에 있던 왜적이 후퇴하는 것을 상주(尙州) 적암(赤巖)까지 추격하여 격퇴시켰다. 다시 함안(咸安)까지 추격하였다가 진주(晉州)로 진영(陣營)을 옮겼는데,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崔慶會),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 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 등이 차례로 와서 모였다. 이때 이미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더니, 며칠도 채 지나기 전에 왜적이 갑작스럽게 쳐들어왔는데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공은 기운이 더욱 굳세어져 여러 왜적들을 집어삼키려고 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성가퀴의 사이에 나가 있으면서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왜적이 비가 오는 틈을 타서 성의 허술한 곳으로 넘어오려고 하자, 공은 스스로 흙과 돌을 날라 그곳을 메우니 병사들이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앞 다투어 성을 보수하였다. 또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 셀 수 없이 많은 적을 죽였는데, 성 부근의 초목이 붉게 물들 정도였다.


왜적이 사방에서 일제히 쳐들어오면서 무기를 몹시 많이 가지고 공격해 왔는데, 공이 번번이 계책을 써서 부숴 버렸다. 또 화살로 왜적의 장수를 쏘아 죽이니, 적장이 스스로 물러갔다. 그때 마침 왜적 한 놈이 성의 해자(垓子) 가에 숨어 있다가 몰래 총을 쏘아 공의 좌측 이마를 맞추었으므로 드디어 공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모든 군사가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여 통곡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과 같았다.


이종인(李宗仁)도 역시 온 힘을 다해 혈전을 치르다가 적병을 양쪽 옆에 끼고는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 등도 모두 촉석루(矗石樓) 아래로 투신하여 죽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왜적이 성을 함락시키고 떠났다.


당초에 공이 “우리들 모두가 한 성에 들어가 있다가 외부에서 원군이 이르지 않을 경우에는 일이 위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다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왜적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렇게 하는 것을 곤란하게 여겨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도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진주는 공이 관할해야 할 곳도 아니고 조정의 명령도 없는데 하필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미 창의사와 약속을 하여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자, 곽재우도 이미 공이 뜻을 정한 것을 알고는 술잔을 나누며 서로 영결하였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곽재우가 말하기를, “다른 장수들은 쉽게 얻을 수 있으나, 황 절도사만은 그에 비길 만한 장수를 얻기가 어렵다.” 하면서 애통해 마지않았다.


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된 고득뢰(高得賚) 역시 창의사 김천일을 따라 싸우다가 같은 곳에서 죽었으며, 첨정(僉正)에 추증된 안영(安瑛)도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싸우다가 금산(錦山)에서 죽었다. 이들은 모두 종시토록 전장을 떠나지 않으면서 죽는 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이에 한꺼번에 남원(南原)에서 세 절의사(節義士)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이 성취한 것은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었으나, 떳떳한 천성이 열렬하여 뺏을 수 없는 것은 피차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향리 사람들이 이들을 함께 제사 지내면서 그 사당을 정충사(貞忠祠)라고 하였다.


공에게는 정직(廷稷)과 정열(廷說)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했다. 손자 위(暐)는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 기축년(1649, 인조27) 봄에 이르러 남원의 향대부(鄕大夫)인 최온(崔蘊) 등 50여 인이 함께 천여 리나 떨어진 양주(楊州)까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써 주길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공은 충신과 절의에 관한 일에 대해 말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제 이 삼현(三賢)의 자취를 기록하여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감히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서문을 지은 다음 명(銘)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지난 옛날 백제 있던 이 한 구역에 / 百濟一區
꿋꿋하고 굳센 장부 무리 있었네 / 毅夫之徒
계백 장군 뒤에 있어 일으키었고 / 階伯後起
성충 장군 앞에 있어 내몰았다네 / 成忠前驅
열렬하고 열렬했던 우리 황공은 / 烈烈黃公
바로 이곳 남원에서 태어났다네 / 挺生玆鄕
삼한 땅의 뛰어났던 장수였으며 / 三韓之良
일만 군사 막을 만한 무위 있었네 / 萬夫之防
세차 마침 용사의 해 되던 그해에 / 歲丁龍蛇
섬 오랑캐 제멋대로 날뛰었다네 / 逆虜跳梁
공은 그때 절도사의 부절 잡고서 / 公時杖節
호남 지역 전담하여 절제하였네 / 專制湖廂
천리 먼 길 외론 군사 거느리고서 / 千里孤軍
멀리 있는 진양 향해 달려갔다네 / 遠赴晉陽
보는 자들 한심하게 여기었으나 / 見者寒心
공은 홀로 떨치어서 일어났다네 / 公自奮揚
장군께서 군사에게 내린 그 호령 / 將軍號令
부월처럼 엄정하고 엄정하였네 / 鈇鉞其嚴
의사께서 한 번 뱉은 승낙의 말은 / 義士一諾
중하기가 천금보다 더 중하였네 / 重於千金
적들 오는 모습 보면 고슴도치고 / 賊來如蝟
공의 용맹 보면 마치 범과 같았네 / 公勇如虎
큰소리로 군사들을 질타를 하매 / 音烏叱咤
호령 소리 우레처럼 울리었다네 / 雷霆吼怒
하늘에서 순조롭게 아니 도와서 / 天不助順
요사스러운 별 보루에 떨어졌다네 / 妖星隕壘
공의 혼은 상제 뜰에 올라갔으나 / 公神帝庭
또한 역시 옛 향리로 돌아왔다네 / 亦返故里
왕께서는 공의 그 공 생각하여서 / 王念乃功
백성들을 시켜 사당 짓게 하였네 / 俾民以興
날짜 가려 뽑고 제수 마련한 다음 / 卜日潔牲
신주 깎아 모시고서 제사 올렸네 / 治主以升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아니하겠나 / 孰敢不敬
더군다나 가래나무 숲 있는 데랴 / 況也梓林
고득뢰와 안영 두 분 계시었거니 / 曰高曰安
아름다움 나란하여 셋이 되었네 / 竝美成三
용머리에 솟아 있는 정자가 있어 / 龍頭之亭
그 절벽에 사적 지어 새길 수 있네 / 石崖可鐫
공의 공적 기록하여 후대에 전해 / 紀蹟傳芳
전 시대의 어진 이와 짝하게 하네 / 用配前賢


[주-D001] 정충사(貞忠祠) : 
남원(南原)에 있는 사당으로 뒤에 정충사(旌忠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임진왜란 때 순절(殉節)한 황진(黃進)ㆍ고득뢰(高得賚)ㆍ안영(安瑛)을 모신 사당이다.
[주-D002] 계미년에……때 : 
1583년(선조16)에 니탕개(泥湯介)를 중심으로 한 회령(會寧) 지방의 여진족이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니탕개는 선조 초에 우리나라로 귀화한 여진인으로, 육진(六鎭) 지역에 출입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를 받아 온 자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경원(慶源)에 사는 여진인들이 민심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경원 부사 김수(金璲)가 이들에게 패해서 여진인들이 부내의 모든 진보(鎭堡)를 점령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 뒤에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과 첨사 신상절(申尙節) 등이 힘껏 싸워 강을 건너서 여진족의 소굴을 소탕하매 난이 평정되었다. 《國朝寶鑑 卷28》
[주-D003] 승제(承制) : 
임금의 명을 받아 외방에 나가 있으면서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4] 고득뢰(高得賚) : 
본관은 용담(龍潭)이고, 자는 은보(殷甫)이다.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경서와 글씨에 뛰어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인 남원(南原)에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휘하의 부장이 되어 금산(錦山) 등지에서 왜병과 맞서 싸웠으며, 진주성(晉州城)이 위급해지자 최경회와 함께 성에 들어가 다른 의병과 협력하여 성을 지키다가 순국하였다.
[주-D005] 안영(安瑛) :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자는 원서(元瑞)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금산의 싸움에서 고경명과 함께 순국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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