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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명(高敬命)ㆍ유팽로(柳彭老) - 연려실기술 제16권

고경명(高敬命)ㆍ유팽로(柳彭老) - 연려실기술 제16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6월에 전라좌도 의병장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고경명(高敬命)과 종사관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경명은, 자는 이순(而順)이며, 호는 제봉(霽峰) 또는 태헌(苔軒)태사(笞槎) 이요, 본관은 장흥(長興)시조(始祖)는 탐라(耽羅)에서 나왔으나, 그 뒤에 본관을 장택(長澤)으로 정하여 주었기 때문에 드디어 장흥 고씨가 되었다. 이다. 대간 맹영(孟英)의 아들로, 무오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때, 벼슬에서 물러나와 광주(光州) 시골에 있었는데,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다가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군사가 금강(錦江)에 이르러 해산해 돌아가니, 이광에게 글을 보내어 준절히 책망했다.팽로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꾀하여 5월에 담양에 모였는데, 팽로 등이 경명을 추대하여 대표자로 하니, 경명이 단 위에 올라, 늙고 병들었음에도 사양하지 않았다. 글을 만들어 도내(道內)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깨우쳐 일러 6월 11일을 군사 일으킬 기일로 정하였더니 선비와 백성들이 많이 응모하여서 군사 6천여 명을 얻었고, 또 각도에 격문을 돌리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 양대수(楊大樹)에게 격문을 보내어 말[馬]을 수집하였는데, 격문의 사연이 격렬하고 간절하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전해가며 외었다.


○ 경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학유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로 하고 정랑 이대윤(李大胤)ㆍ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유학(幼學) 양희적(梁希迪)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 군량 조달하는 직책)로 삼았다. 광주(光州)에 사는 정자 오자(吳玼)는 기개와 의리를 숭상하는 사람인데 항상 고씨(高氏) 집안의 충성스럽고 효도함을 사모하더니, 이제 달려와 종사가 되고, 진원(珍原) 사람 김인혼(金麟渾)인후(麟厚)의 종제 은 담력과 지략이 있었는데 경명의 막하(幕下)에서 참모 노릇을 하고, 보성(寶城) 사람 오유(吳宥)는 원래 원수(元帥)의 막하에 있었는데 의병을 모집해 와 경명의 부장(副將)이 되었다.


○ 팽로는, 자는 군수(君壽)이며, 본관은 옥과(玉果)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학유(學諭)였다. 서울이 함락하였다는 것을 듣고 울부짖으며 대박ㆍ회적 등과 더불어 경명에게 가서 향리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니 경명이 즐겁게 그 의견에 좇아 즉일로 격문을 발송하였다. 그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팽로 등이 맨 먼저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호남의 삼창의(三倡義)라고 일컬었다.


○ 그 격문에, “요즈음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 어기듯이 하더니 마침내는 춘추 때 오 나라가 주 나라를 갉아먹던 짓을 함부로 한다. 우리에게 방비가 없음을 틈타 허를 찔러 몰려 와서 하늘도 속일 수 있다 하여 제멋대로 곧장 올라온다. 우리나라의 병사(兵使)ㆍ수사(水使)들은 갈림길에서 서성거리고 고을 맡은 수령들은 산골로 도망해 숨는다. 도적놈들을 임금이나 부모에게로 보내는 것은 이 어찌 차마 할 일이며, 임금에게 나라의 존망을 근심하게 함이 너희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어찌하여 백 년 동안 길러 놓은 민생들로서 일찍이 한 개의 의기 있는 남자도 없단 말인가.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으니 여진(女眞)이 원래 병법을 알지 못함이 있으며 중행열(中行說)을 매치지 못한 것은 한(漢) 나라가 워낙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갑자기 그 천참(天塹)의 가치를 잃게 되어 흉악한 칼날이 이미 수도에 육박하였다.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는 비웃음은 진실로 마음 아픈 일이니,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넜다는 말이 불행히도 오늘에 근사하다. 우리 임금께서 옛날 주 나라 태왕(太王)이 빈(邠)을 떠나던 심경으로, 당 나라 명황(明皇)이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 서북으로 행차하였다. 이 일은 대개 종묘 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지방의 잠깐 동안의 노고쯤이야 꺼릴 것이 있으랴. 공(鞏)과 낙(洛)의 풍진(風塵)에 임금의 낯빛에 여러 번 깊은 근심이 나타났고 민산(岷山)과 아미산(峨眉山)의 험한 사다리 길에 당 나라 명황의 행차가 먼 길을 건너간 일과 같다.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난을 숙청한 것은 원로(元老)에게 힘입었고 육지(陸贄)가 기초한 애통조(哀痛詔)가 또 우리 조정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血氣)있고 목숨을 가진 자로서 누구인들 분통하여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사람의 계책이 잘 되지 못하여 나라의 일이 어찌 이렇게 어렵게 되었는가. 봉천(奉天)으로 피난한 당 나라 덕종의 행차는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상주(相州)에서 싸우던 송 나라의 군사와 같이 우리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이 꿈틀거리는 벌과 땅벌[蜂]같은 더러운 오랑캐들이 들끓고 있는데, 아직 흉한 고래를 잡아 죽이 듯하지 못하였다. 적이 성 안에서 아직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장막 위에서 날고 있는 제비와 같고, 서울 부근을 점령한 것은 우리[檻] 안에서 날뛰는 원숭이와 같다. 비록 명 나라 군사가 소탕(掃蕩)할 날이 있을 것이나 흉악한 무리가 당장 흩어져 달아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경명(敬命)은 만절(晩節)의 단심(丹心)이요, 흰 머리의 썩은 선비다. 밤중의 닭소리를 들으니 난리를 감당할 수 없으나 중류(中流)의 돛대를 치면서 외로운 충성을 다짐한다. 다만 개와 말이 주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은 충성만을 품고, 모기나 등에가 태산을 짊어질 힘이 없음은 생각지 아니한다. 이에 드디어 의병을 규합하여 바로 서울을 향할 것이니, 소매를 떨치고 장단(將壇)에 올라 눈물을 뿌리어 여러 동지에게 맹세하노라. 곰을 치고 범을 잡는 장사들이 우레같이 일어나고 바람같이 달려오며, 말을 뛰어 타고 관문(關門)을 뛰어 넘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비오듯 몰아온다. 대개 협박당하여 응하거나 강요하여서 쫓아온 것이 아니고, 오직 신자(臣子)로서 충의의 마음이 다같이 지성에서 나왔다.국가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있어서 어찌 감히 작은 제 몸을 아낄 수 있으랴.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지었으니 처음부터 직책상의 관직이나 지역에 상관이 없고 군사는 정의(正義)가 힘이니, 강하냐 약하냐는 논할 바가 아니다. 대소의 인사들이 의논하지 않고도 말이 같으며 원근의 지방에서 소문만 듣고도 다 같이 일어서니, 우리의 각 군 수령들과 각도의 선비와 백성들이 충성으로 어찌 임금을 잊겠는가. 의(義)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혹은 병기로 돕고, 혹은 군량으로 구조하며 혹은 말을 달려 행진의 선두에 앞장서고, 혹은 쟁기를 놓고 농사터에서 일어서 나오라.힘이 미칠 수 있는 대로 오직 의로운 길로 나아갈 뿐이니, 능히 임금을 어려운 데 가서 구호할 이 있거든 나는 그대와 더불어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노라. 가만히 생각하니, 임금께서는 멀리 서도에 가 계신데, 그곳 풍속의 아름다움은 멀리 기자(箕子) 때부터이며 군사가 강하기는 일찍이 수(隋) 나라ㆍ당 나라의 백만 대병을 꺾었던 곳이다. 조정의 계획도 장차 조처가 있을 터이며 국가가 어찌 한쪽 지방에서만 유지하겠는가. 잘 패하면 망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복덕성(福德星)이 바야흐로 오(吳)의 분야(分野)에 다달았으며, 큰 근심이 열렸으니 노래불러 한(漢) 나라를 더욱 생각하네. 여러 호걸들이 시국을 바로잡는데 신정(新亭)에서 우는 것을 왜 하랴. 백성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서울로 돌아오는 행차를 곧 보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일월록》 ○시장(諡狀) 이명한(李明漢)의 찬


○ 6월에 연산(連山)에 나아가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전령을 보내어 금산(錦山)에 남아 있는 적을 칠 것을 약속하였다. 이광(李洸)이 군사를 돌려 자기와 함께 전주를 지키기를 청하였으나 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진산(珍山)으로 진군하였다.


○ 처음에 경명 등이 군사를 일으킬 때 전 좌랑 양산숙(梁山璹)으로 하여금 직접 행재(行在)에 가서 임금 앞에서 남방의 사태를 아뢰니, 산숙이 돌아올 때 임금이 면대하여 타일러 이르기를, “돌아가 고경명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너희들이 빨리 수복하여 나로 하여금 너희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기를 원한다고 하여라.” 하고, 멀리서 경명을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叅議兼招討使)에 임명하였다.이달 9일에 경명이 곽영과 더불어 군사를 합쳤다. 대개 경명의 두 아들 종후(從厚)ㆍ인후(因厚)가 각각 남원(南原)ㆍ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의 군량과 군사를 모아 여산(礪山)에 모여서 그대로 충청도ㆍ경기도를 진군하여 평양에 도달하기를 기약하였더니, 은진(恩津)에 이르러서 막하의 장수들이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병들이 금산(錦山)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되돌아가서 전라도 구하기를 굳이 청하고, 또한 전주의 형세가 위급하다는 것을 듣고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珍山)으로 들어가서 곽영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어 금산의 10리 밖에서 주둔하였다.경명이 정예한 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치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의 말이 부상함으로 물러나 달아나니 우리 군사가 약간 후퇴하였다. 저녁에 경명이 광대하는 사람 30명을 시켜 성 밑의 토성(土城)에 달려들어가 성 밖에 있는 관청 민가들을 불지르고, 진천뢰(震天雷)를 터뜨리어 성내의 창고와 노적을 연소시키니 적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었다.


○ 곽영이 사람을 보내 다음 날 합전(合戰)하기를 약속하였다. 아들 종후가 고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적병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는 것이 직책이다.” 하므로, 종후가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10일 새벽에 성 밖으로 진군하는데, 경명이 먼저 기병 8백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돋우었더니, 적병이 성벽을 비우고 나와서 먼저 관군(官軍)에게 덤벼들으니, 전봉장(前鋒將)인 영암 군수(靈巖郡守) 김성헌(金聲憲)이 먼저 달아났다.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다시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고을의 관군에게 달려들었으나 방어사 곽영의 진에서는 멀리 바라만 보고 흩어져 버렸다. 경명이 혼자 담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버티어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급한 소리로,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고 외치니 의병(義兵)의 진도 따라 무너졌다.경명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는 데 숙달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게 되면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좌우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아나기를 청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죽음을 모면하려 할 것이냐.” 하였다. 부하들이 붙들어 말에 태웠으나 금방 말에서 떨어지고 말이 달아나 버리니 부하인 유생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경명에게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 하인에게, “대장이 모면하였으냐?”고 물으니, “아직 못나왔습니다.” 하였다.팽로가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니, 경명이 팽로를 보고, “나는 면치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軍事)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였다.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웠다. 경명이 드디어 팽로ㆍ영(瑛)등과 더불어 함께 죽었다. 인후(因厚)는 거기서 죽고 종후(從厚)는 무너진 군사들 속에서 나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었다. 가까운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울음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무너졌던 군사들은 그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차츰 모여 왔으나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부르짖어 울면서 흩어졌다. 《일월록》시장


○ 처음에 종후 등이 시체를 가져다가 금산의 산 속에 가만히 묻었다가 무릇 40여 일이나 되어서 염습(歛襲)을 하였는데, 더위와 비를 겪었지만 얼굴빛이 살아 있는 것 같아서 보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장사한 다음 날 바람과 눈이 섞여 일어나고 긴 무지개가 무덤 왼쪽에서 생겨 무덤의 경내를 가로질러 수십 리에 뻗치고 이상한 광채가 달이 넘도록 사라지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충성과 분노의 감응이라고 하였다. 《명신록》시장


○ 어떤 이의 말에는, 이때 우리나라 사람 남녀가 적진 속으로부터 와서, “우리는 도망쳐 돌아온 사람입니다.” 하니, 경명이 그들이 첩자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진심으로 위무하여 주었더니, 이 날 밤에 적군이 어둠을 타서 습격하여 왔다고 한다. 《기재잡기》 ○ 시장에 복병을, “이 밤에 적이 습격하려고 가만히 나와서 복병을 설치하다가 군사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 경명이 의병을 일으킬 때 경기도 이남의 선비들이 모두 따랐으나 다만 충의의 마음으로 서로 힘썼을 뿐이요, 실상은 군사 쓸 줄은 알지 못하였었다. 경명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이 피난하고 있으니 우리들이 죽어야 할 때다.” 하고 격문을 각도에 보내어 깨우쳐 이르니 뛰어 일어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군사의 행진에 기율이 없고 이르는 곳에 진영의 설비가 없어서 마침내 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재잡기》


○ 산숙이 도착하니 경명이 이미 죽었는지라, 받아온 교서(敎書)로서 남은 군사들에게 선포하니 억센 장수들과 무지한 백성들도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소문이 조정에 알려지니 임금이 크게 슬퍼하고 경명에게 예조 판서ㆍ대제학을 증직하고 뒤에 더 높여 좌찬성을 증직하였다. 인후에게는 예조 참의를, 팽로에게는 사간을, 영(瑛)에게는 장악 첨정(掌樂僉正)을 증직하였다.


○ 계해년에 교리(校理)로서 파면되어 돌아와 집에서 지내기를 19년 동안이나 하다가 신사년에 김계휘(金繼輝)가 주청사(奏請使)로 북경에 갈 때 공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였고, 임오년에 이이(李珥)가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을 때 공을 천거하여 종사관(從事官)을 삼았고, 경인년에는 승진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명신록》


○ 경명이 백수서생(白首書生)으로 전란을 당하여 의(義)를 들고 일어서니, 어리석은 부녀자도 사나운 사나이도 소문만 듣고 다투어 달려가 좇으므로, 열흘에서 달포 사이에 의병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의로운 기색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叅議兼招討使)의 임명장과 군중에 내린 교서가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죽고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좌찬성을 증직하였다.이광(李洸)이 경명에게 전일의 감정이 있어, “경명이 어둠을 타서 행군하다가 군사가 무너지므로 죽었습니다.” 하고 무함하여 아뢰었다. 이정복(李廷馥)이 순찰사가 되어 그의 전사한 실제 상황을 아뢰었다. 을미년 여름에 명을 내려 정려(旌閭)를 세우고, 신축년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히 광주에 사당을 짓게 하고, 포충사(褒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으며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비문 ○ 시장


○ 임진년 봄에 경명이 천문(天文)을 관찰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將星)이 좋지 못하니 장수는 반드시 불리할 것이다.” 하였다.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기에 이르러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부쳐 가족 일을 부탁하였다. 그가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것은 평소에 정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일월록》시장


○ 신묘년 가을에 경명이 정탁(鄭琢)에게 편지를 보내, “경명의 한 집안은 명년에 마땅히 큰 화가 있어서 부자가 모두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점쳐 보고 한 말이다. 《기재잡기》


○ 인조반정(仁祖反正)한 처음에 예관을 파견하여 포충사에 제사하였는데, 제문에, “내가 왕위를 이어받아 백성의 인륜을 바로잡으려 하노라. 충신과 절사(節士)를 생각하니 나의 신하 안 된 것이 한스럽다. 남쪽 지방은 선비의 기북(冀北)이다. 국가의 표창하고 권면함이 없으면 무엇을 모범으로 할 것인가.” 하였다.


○ 경명의 아들은 종후ㆍ인후이고 딸은 선비 노상룡(盧尙龍)의 아내가 되었더니 정유년 왜란 때 왜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다가 죽었다.


○ 12월에 경명의 맏아들 전 현령 종후(從厚) 등이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먼저 통문을 돌리기를, “불행한 때를 만나 집안의 화변이 망극하다. 불초고(不肖孤)는 초토(草土 여기서는 상중(喪中)이란 말이다)에 앓고 누어 아직까지 이 왜적들과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아 있다. 이번에 첨지(僉知)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서 각도에 통고하여 왜적에게 원한을 품고 통분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일을 함께 도모하려 하니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지라, 누군들 일어나지 않겠는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 완도(完堵)는 반드시 그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충청도에서 깃발을 들고 일어설 것이다. 나는 비록 못났으나 어버이의 장사도 이미 마쳤으니 이 몸이 죽어도 유감이 없다. 상복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들과 더불어 군사와 병기를 수습하여 북쪽으로 머리 돌려 적과 싸워 죽을 계획을 하고자 한다.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ㆍ의 세 고을 수령들 또한 하늘에 사무친 통분을 품고 있는데, 도체찰사는 그들에게 군사를 합하여 원수를 갚도록 하고 법도와 규칙에 구애받지 않도록 허락하였다.아아, 다만 호남지방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기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로서 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도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다행히 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더라도 서리와 이슬 속에서 병을 얻어 그로 인해 죽게 되었다면 또한 이 원수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내 선친이 담양(潭陽)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남도의 여러분들이 나랏일에 같이 죽기를 기약하여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고서 선친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하였으니, 진실로 형제 같은 의가 있었던 것이다.불행히 공업을 끝까지 성취하지 못하였으니 여러분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의 일처럼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때의 부하 무사들은 이미 다 의병에 달려왔다. 원컨대 나를 불초하다고 생각지 말고 담양에서 피를 마셔 맹세하던 일을 회상하여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약을 맺고 군사의 기일을 정하기 바란다.” 하였다. ‘복수(復讎)’를 군(軍)의 구호(口號)로 삼고 광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때마침 군사 징발이 여러 갈래로 겹쳤기 때문에 민간에 있는 장정이 없어서 모집된 군사가 겨우 수백 명이었는데, 정철(鄭澈)이 사노(寺奴)와 내노(內奴 군중에 속한 종)들을 의병에 종속시켜 주어서, 드디어 천여 명을 뭉쳐 가지고 영남(嶺南)으로 향하였다.


○ 조수준(趙守準)으로 계원장(繼援將)을 삼다.


○ 계사년 6월에 진주(晉州)의 싸움에서 죽었다.


○ 부자가 모두 사절(死節)을 같이 하였으니 의로움이 옛날 진(晉) 나라의 변씨(卞氏)의 문중과 같았다. 종후도 또한 문장에 능하여 말을 세워놓고 격문(檄文)을 기초하였는데 문장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말을 수집하기 위하여 제주(濟州)에 보내는 격문 속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바다 밖에서도 옷을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있을 줄을 나는 안다. 채찍을 잡고 서서 천하에 말[馬]이 없다 하지 말라.” 이것이 깨우치는 절구로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전해 가며 외웠다. 이러한 인재로서 불우한 채 일생을 마치었다. 신묘년 봄에 지제교(知製敎)에 뽑혔으나 곧 사헌부의 탄핵을 입었다. 《상촌휘어》


[주-D001] 양(亮) : 
금(金) 나라의 황제 양(亮)이 임금을 죽이고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으므로 역적 양(亮)이라 하는데, 송 나라와의 맹약(盟約)을 배반하고 송 나라를 치다가 중도(中道)에서 자기의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주-D002] 여진(女眞)이 …… 있으며 : 
여진족이 고립된 군사로 송 나라에 깊이 쳐들어 갔을 때, 송 나라 장수가, “여진(女眞)이 본시 병법을 모르는구나.”한 말이 있다.
[주-D003] 중행열(中行說) : 
한(漢) 나라 사람으로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여 본국을 해쳤으므로 가의(賈誼)가 임금에게, “신이 흉노를 쳐서 중행열(中行說)의 등에 매를 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4] 남조(南朝)에 사람이 없다 : 
금(金) 나라가 군사를 거느리고 송 나라를 침략하여 들어가서, “남조[宋]에 사람이 없구나, 이 지방을 지켰더라면 내가 강을 건너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5] 북군(北軍)이 …… 말 :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진(陳) 나라에 수(隋) 나라 군사가 창졸간에 침입하는 것을 보고 북군이 강을 날아서 건넜다고 놀랐다.
[주-D006] 빈(邠)을 떠나던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적(狄)의 침입을 받자 수도인 빈(邠)을 버리고 도망친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주-D007] 서촉(西蜀)으로 피난하듯 : 
당 나라 명황(明皇)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서촉(西蜀)으로 도망한 것을 말한다.
[주-D008] 이성(李晟) : 
당 나라의 역적 주자(朱泚)가 장안(長安)을 함락시켜, 임금[德宗]이 봉천성(奉天城)으로 파천(播遷)하였을 때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부수고 회복시키니 임금이 기뻐하여,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을 위한 것이로다.” 하였다.
[주-D009] 애통조(哀痛詔) : 
난을 당하여 임금이 자기가 죄책을 책임지는 애통한 사연의 조서를 죄기조(罪己詔)ㆍ애통조라 하는데, 당 나라 덕종(德宗) 때에 육지(陸贄)가 기초한 조서는 가는 곳마다 장수와 군사들이 감동되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주-D010] 봉천(奉天)으로 …… 덕종의 행차 : 
당 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피하여 봉천성(奉天城)으로 갔던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선조가 의주에 파천해 있는 것을 말한다.
[주-D011] 밤중의 …… 들으니 : 
진(晉) 나라의 조적(祖逖)이 잠을 자다가 새벽녘이 되기 전에 우는 닭소리를 듣고 같이 자던 유곤(劉琨)을 발로 차서 깨우며, “난리가 나겠구나. 공을 세워보세.” 하였다.
[주-D012] 중류(中流)의 …… 치면서 : 
조적(祖逖)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면서 중류에서 돛대를 치며 말하기를,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주-D013] 분야(分野) : 
여기서의 분야는 천문학상의 술어인데, 천문(天文)에도 어느 지방에 행당되는 부분이 따로 있다. 옛날에 복덕성(福德星)이 있는 나라를 침범하면 침범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복덕성이 오 나라의 분야에 있을 때에 진(秦) 나라가 침하였다가 몇 해 뒤에 오 나라는 회복되고 진 나라는 망하였다.
[주-D014] 신정(新亭)에서 우는 것 : 
진(晉) 나라가 외래 민족에게 중원(中原)을 잃고 강동(江東)으로 옮겨 갔을 때에 여러 사람들이 신정(新亭)에 모여서 서로 보며 울었다.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힘을 다하여 회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울기만 하는가.” 하였다.
[주-D015] 기북(冀北) : 
기북(冀北)은 중국에 있는 지방의 이름으로 말[馬]이 많이 나는 곳이다. 여기서는 남방에 선비가 많다는 말이다.
[주-D016] 함께 …… 있다 :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을 머리에 같이 이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옛 말이 있다.
[주-D017] 진(晉) 나라의 변씨(卞氏) : 
진(晉) 나라 변곤(卞壼)의 부자(父子)가 충효(忠孝)로 함께 죽었다.
[주-D018] 천하에 …… 하지 말라 : 
한유(韓愈)의 글에, “천리마(千里馬)가 세상에 없는 것은 아닌데,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채찍을 들면서 세상에 말이 없다 한다.” 하는 말이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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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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