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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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경오년(1690) - 농암집 제13권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다만 한낱 말만 잘하고 힘써 실천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니 이 점이 부끄럽습니다. 고통스러운 눈병이 사실 글을 보는 데에 방해가 되긴 하겠지만 주 선생(朱先生)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한가로이 앉아 있음으로 인하여 조용히 심성을 함양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요. 훗날 또 말씀하시기를, “일찍 눈이 어두워지지 않은 것이 매우 한스럽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정말 실제로 겪은 뒤에 한 말로서 농담으로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학문을 할 때에는 암송을 많이 못 하고 강론을 정밀히 못 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바로 심지를 단단히 지키고 본성을 함양하는 공부에 혹 집중하지 못하는가를 근심해야 하니, 만약 지금처럼 고요히 앉아 있는 기회에 책을 펼쳐 읽는 공부를 줄이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본원을 함양하는 데에 집중한다면 그 효과가 반드시 독서보다 진일보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읽었던 글 중에 암송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하여 깊이 연구하고 자세히 이해한다면, 이러한 공부가 또 어찌 책만 두루 많이 보는 것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고명의 병은 하늘이 훌륭한 인재로 만들기 위해 내린 시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니 근심할 것이 못 될 듯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 선생이 만년에 오로지 《맹자(孟子)》의 구방심장(求放心章)을 가지고 학자들을 이끌고 깨우쳐 주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노파심이 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무리 또한 이 말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그들의 뜻은 마침내 한낱 이 마음 찾기만을 일로 여기자는 것이었고 독서하고 궁리(窮理)하기를 더 이상 그와 병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주 선생이 사람을 가르친 뜻과 같지 않습니다. 털끝만한 차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잘못이 파생된 것이니, 이 또한 잘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컨대 이 한마디 말이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 기초요 본령이며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이전에 이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모두 구차하고 지리멸렬하여 일에 대처할 때에는 무력하여 활기가 없고 이치를 볼 때에는 범범하여 정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보고 이해한 것이며 강설하여 얻은 것일지라도 모두 있는 듯 없는 듯 흐리멍덩하여 내면적으로 응집된 것도 없고 외면적으로 응용할 수도 없었으니, 학문을 이처럼 한다면 어찌 한평생을 허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생각하면 매우 두렵습니다.
고명의 병폐가 꼭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두 가지 비슷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래서 고명께서 《맹자》의 이 말에 종사하여 오로지 일상생활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살피고 실제적으로 수습하여 근본을 북돋기를 내심 바라는 바이니, 그렇게 한 뒤에야 독서하고 궁리하는 공부가 비로소 귀착되는 바가 있어 한 치, 한 자를 얻어도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저는 근래에 이러한 뜻을 매우 분명히 알긴 했지만 타고난 기품이 조급하고 또 본심을 잃어버린 지가 벌써 오래된 까닭에 갑작스레 수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에 마음이 보존된 때는 드물고 도망간 때가 많으며 맑은 때는 적고 어두운 때가 많으니, 이 때문에 매우 마음이 유쾌하지 못합니다.
책을 읽는 공부마저 계속하지 못하여 더욱 걱정입니다. 《논어(論語)》는 아직 절반도 보지 못하였는데 슬프고 쓰라린 마음과 질병으로 계속 고통스러워서 독서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한창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는 일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공부하는 힘이 분산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전일하고 정밀하게 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자대전차의》는 우옹(尤翁)이 지은 것으로서 《주자대전》에 처음부터 주석을 달았는데 20여 권쯤 됩니다. 근년에 간행하자는 대신(大臣)의 논의로 인해 성상께서 옥당에 교정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제가 그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의심스러운 부분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한 부분마다 저의 의견을 써내게 되었습니다.
노선생(老先生)이 살아 계실 적에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수정해야 한다고 하신 부분이 열예닐곱 군데가 됩니다. 그런데 불행히 그 작업을 마치기 전에 급작스레 오늘의 화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듣건대 노선생이 임종하실 적에 간절히 이 일을 부탁하셨다 하니 그 뜻이 정말 비통하다 하겠습니다.
지금 사안은 비록 이전과 다르지만 우선 의심스러운 부분을 모두 풀이하여 문인(門人)들과 상의하게 되기를 기다리고자 합니다. 저의 견해를 비록 이따금 드러내어 밝힌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문장의 뜻을 훈고한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리상 중요한 부분도 이따금 있기는 하나 많지 않습니다. 이 책의 전말에 대해서 어쩌면 듣지 못했을 듯하므로 아울러 언급합니다.
고명께 찾아와서 묻고 배우는 선비들이 상당히 있는지요? 전에 들으니, 광주(光州)에 박중회(朴重繪)라는 사람이 있고 영암(靈巖)에 양득중(梁得中)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모두들 후배 가운데 수재라고 칭찬한다 하였는데 그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인물과 문장, 학문이 모두 어떠합니까? 부디 품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에 우리 유학을 공부하는 자가 없지는 않으나 성심으로 진보하여 뭔가 크게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할 만한 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사우(師友)간의 도가 상실된 지 오래되어 모든 가르치고 배우고 강론하는 것들이 대체로 다 허울뿐이고 더 이상 실제로 이끌어 주고 진정으로 절차탁마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러한 버릇이 오래되다 보면 어찌 이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 인재를 찾아보기 어려울 뿐만이 아닙니다. 배우러 오는 사람이 있다면 이러한 뜻을 살피고서 맞이하고 이끌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成卿 조성기(趙聖期))이 마침내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으니 서글픕니다. 그의 학문은 비록 그다지 바르고 합당하지는 못하나, 중요한 것은 사색이 깊고 식견이 환하여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높이는 공부에 있어서 터득한 것이 실로 깊었으니, 근래의 선배들 중에 찾아보더라도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륜 지키기를 좋아하고 우의를 돈독히 하여 그 영향이 크고 넓었으며 후학을 열심히 가르친 것으로 말하면 더욱 그를 잊지 못하게 하니, 그를 생각할 적이면 슬프고 안타깝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논맹정의(論孟精義)》도 반평생을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우옹의 말씀을 들으니, 지난날 소설을 보니 중국 사람들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연경(燕京)의 저자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근년에야 비로소 사신 갔다 온 사람을 통하여 이른바 《주자유서(朱子遺書)》라는 책을 얻게 되었는데, 주자가 편집한 책들이 다 그 속에 들어 있어서 《근사록(近思錄)》, 《연평답문(延平答問)》, 《상채어록(上蔡語錄)》 같은 글들이 모두 한 책으로 묶여 있었고 《논맹정의》도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이 책은 근년에 간행된 것으로서, 이 책이 우리나라로 오게 된 것은 정말 크나큰 다행입니다.
반드시 이 책을 보고 난 뒤에야 두 선생과 그 이하 여러 문인들의 학문의 깊이와 순수성을 자세히 보고 더욱 확고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문(或問)》에 논한 여러 설들의 시비와 득실은 정말 고요(皐陶)의 판결처럼 털끝만치의 잘못도 없고, 《집주(集註)》의 풀이는 지극히 정밀하고도 정확하여 한 글자 한 구절도 더하거나 뺄 수 없었으니 정말 정밀한 저울로 단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요즈음은 민가에 많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니, 조만간에 한번 보고 싶다면 구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주-D001] 임덕함(林德涵)에게 답함 : 작자의 나이 40세 때인 1690년(숙종16)에 쓴 것이다. 임덕함의 이름은 영(泳, 1649~1696),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나주임씨 정자공파이며 첨지중추부사 서윤공(庶尹公) 일유(一儒)의 아들로 몽촌공 타의 손자다.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에게 수학하였는데,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작자보다 2년 연상이며 작자와 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다.
* 박중회(朴重繪, 1664~1691)의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수여(受汝), 호는 소은(素隱). 광주에 살던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의 아들이다. 진천사(眞泉祠)에 배향되었고 양득중(梁得中)의 『덕촌집(德村集)』에 그의 만시(挽詩)가 실려 있다. 저서로 『소은집(素隱集)』이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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