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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亂中雜錄)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 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저술한 야사(野史) 해제


이 책은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전라도 남원에서 유학자이며 무용(武勇)을 겸비한 의병장(義兵將)으로 이름이 높은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선생이 저술한 야사(野史)이다.

저자 조경남은 한양 조씨(漢陽趙氏)로서 태종조(太宗朝)의 우상(右相)이었던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의 후손이며 중종조(中宗朝)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조숭진(趙崇進)의 현손이다. 선조(宣祖) 3년(1570년) 11월에 남원부(南原府) 원천내촌리(源泉內村里)에서 났으니,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처사(山西處士) 또는 주몽당(晝夢堂)이라고 한다.

그는 자질이 명민하고 의표가 준수하여 3살 때 시구(詩句)를 듣고서 외었으며, 6세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 양씨(梁氏) 슬하에서 자랐다. 13세 때에는 또 모친상을 당하여 외조모 허씨(許氏)의 교양을 받았으나 이때부터 그는 의젓한 성인(成人)의 모습으로 3년상을 애통과 효성으로 마치는 한편, 학업에 정진하여 경전(經傳)과 제자서(諸子書)를 관통하였으며, 저술에도 괄목의 경지에 이르렀고 본《난중잡록》을 시작해서 쓰기도 이때부터였다.

한편으로 활쏘기를 연습하여 백발백중의 묘기를 쌓아서 후일 국난에 위훈을 세운 기초가 된 것이다 17세에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문하에 나아가서 성리학과 실천궁행(實踐窮行)의 요체를 배워 사문(師門)의 격찬을 받았다. 선조 25년(1592년)에 왜란이 일어나니 제봉(齊峯) 고경명(高敬命)의 의진(義陣)에 달려갔다가 외조모 허씨의 병보가 급함을 듣고 돌아와서 시탕(侍湯)하였고, 그해 8월에 동지 정사달(丁士達) 등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켜 10여 차의 전투에서 많은 적추(賊酋)를 사살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선조 30년(1597년)에 왜적의 재침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이끌고 남원ㆍ곡성ㆍ섬진(蟾津)ㆍ함양(咸陽)ㆍ산음(山陰)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 등지로 전전하면서 무수히 적을 섬멸하였으며, 명장(明將)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전봉(前鋒)이 되어 초인의 전략을 구사하였으며 한 번 쏜 화살에 5, 6명의 적을 연관(連貫)하여 전 명군을 경탄케 하였다.

유 도독(劉都督)은 그를 평하기를, “동국의 열남자다. 학문은 삼재를 통하였고 가슴에는 만갑을 담았으며 산림기상을 가졌으니 아마 제갈무후에 견줄 만한 위인이다.” [東國豈無烈男子 眞所謂學究三才 胸藏萬甲 又有山林之爭 其諸葛武候之比宇] 하였다. 권율(權慄) 도원수(都元帥)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그의 충용한 공적을 상주하려 하였으나, 그는 힘써 사양하여 이르기를, “나는 다만 신자의 직분을 다한 것일 뿐이다.” 하고,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31세가 되던 선조 33년(1600년) 경자에는 자기 향리에서 수백의 인명을 해친 큰 백호(白虎)가 횡행하여 방어사(防禦使) 원신(元愼)이 잡으려고 고심을 하다가 못 잡고 나국(拿鞫)까지 받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범이 다니는 길에 틀을 차려놓고 기다리는데 걸려서 틀을 달고 산으로 뛰는 호랑이를 활로 명중하여 잡았다. 새로 부임한 방어사 이사명(李思命)이 크게 감사히 여겨 범고기와 말안장, 은장도와 쌀 5석을 상으로 보내니 그는 고기만 받고 다른 것은 다 돌려보내면서, “범 한 마리 잡았다고 이런 것을 받을 수 있겠나. 만약 이런 곡물이 있으면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라.” 하였더니, 방어사는 쌀 30석을 그 마을 민호에 보내왔다.

그 후부터는 문을 닫고 저술에 전념하여 《난중잡록》을 비롯하여 《제례의(祭禮儀)》ㆍ《성리석(性理釋)》ㆍ《오상론(五常論)》ㆍ《소견록(消遣錄)》등 많은 저서를 완성하였다. 인조(仁祖) 2년(1624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그때마다 의병을 모아 서울로 떠나갔으나 도중에서 난이 평정된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그는 일생을 국란에 진췌(盡悴)하다가 인조 19년(1641년) 신사년 1월에 72세로 서거하였다.

숙종(肅宗) 7년(1681년)에는 지방 유림이 합의하여 남원 신포(新浦)에 주포서원(周浦書院)을 세워서 유덕을 추모하였으며 철종(哲宗) 12년(1861년)에는 유림 박창규(朴昌奎) 등의 상소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하여 생전의 공훈이 포장되었다.

이 《난중잡록》은 저자 조경남선생이 13세 때인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 12월에 태양이 세 개로 갈라져서 떠오르면서 쌍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고서 앞으로 반드시 이변이 있을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그날부터 일록(日錄)을 쓰기 시작하였다. 제 1차로는 광해군(光海君) 2년(1610년) 경술년까지 국내의 중요한 사실을 엮어서 《난중잡록》이라고 명명하여 4권을 완성하였으니, 내용은 대개 임진ㆍ정유 두 차례 왜란의 기사가 주요 부분이 되어 있으므로 표제를 그렇게 정한 것이다.

처음 이 4편이 끝나고서 그의 자서문(自序文)에 이르기를, “7년의 긴 세월을 전쟁으로 지나오면서 나랏일에 큰 힘이 되지 못하였으나 마음만은 이 나라와 왕실을 떠나지 못하여, 승전한 기록은 기쁜 마음으로 춤추면서 쓴 것이고 패전한 기록은 통분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다른 날 이 책이 지사(志士)가 무릎을 치면서 감격하여 읽을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잇달아 일어나는 명(明) 나라와 청(淸) 나라 사이의 분쟁으로 우리나라에서의 북방 출병 문제와 광해조의 모비 유폐(母妃幽廢),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의 피살, 인조 반정(仁祖反正) 등 여러 사건과 이괄의 반란,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의 큰 국난을 당하여 그는 계속 기록에 정진하였으니, 즉 광해 3년(1611년) 신해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 무인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여 《속잡록(續雜錄)이라는 이름으로 4권을 완성하였다.

이상 전후의 기간을 통산하면 모두 57년간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국가 전체의 역사적 기록을 실었고 전란 중 저자 자신이 의병장으로 전투한 사적 등은 객관적 견지에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 특히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된 자료 중에는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의 기록이 대부분 실려 있는데 이것은 이 책만으로 그 귀중한 자료가 전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평상시 국내에 큰 일이 없이 평온하게 지난 연대에는 그 중에서 특기할 큰 사건만을 듣고 본 대로 기록하여 극히 적은 양으로 지나가는 해가 많으나 전란과 그 외에 큰 사건이 있던 해는 1년 분의 기록이 상당히 방대하게 수록되어 있다. 그 후손가에 보존된 초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편찬되어 있다.

제 1 권, 선조 15년(1582년)~동 25년(1593년) 7월까지
제 2 권, 선조 25년 8월~동 26년(1594) 6월까지
제 3 권, 선조 26년 7월~동 31년(1598년) 12월까지
제 4 권, 선조 32년 1월~광해 2년(1610년) 2월까지
이상 4권 3책으로 《난중잡록》이 성립되었고 그 이후 부분인 《속잡록》은 광해 3년(1611년)부터 인조(仁祖) 16년(1638년)까지의 기사로서 다음과 같이 편집되어 있다.
제 1 권, 광해 3년(1611년) 1월~동 13년(1621년) 12월까지
제 2 권, 광해 14년(1622년) 1월~인조 6년(1628년) 11월까지
제 3 권, 인조 6년 12월~동 13년(1635년) 12월까지
제 4 권, 인조 14년(1636년) 1월~동 16년(1638년) 12월까지

이것도 4권 2책으로 이상과 같이 구성되었다. 그래서 전후 57년간의 기록이 총 8권 4책으로 되었고, 권수(卷首)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최시옹(崔是翁), 저자인 산서옹(山西翁)의 서문이 있고 끝에는 한익철(韓翊哲)의 발문과 저자의 11세 종손(宗孫) 조태희(趙台熙)의 간행사(刊行辭)를 붙여서 지난 1964년 9월에 후손들이 석판으로 간행 반포하였다. 이 간행사에 의하면 인조 때에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면서 이 초본을 올려다가 사료(史料)로 참고하였고, 그 부본을 작성하여 정부에 보관하고 원본은 효종(孝宗) 8년(1667년) 정유년에 본가에 돌려주었다. 뒤에 고서간행회에서 《대동야승(大東野乘)》을 간행할 때에 그 중에 이 《난중잡록》이 들어 있었으니, 아마 정부에 보존되었던 부본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는 것이라 하였다.
《대동야승》중에는 제 26권부터 34권까지의 사이에 본서를 9편으로 나누어서 수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위에 말한 본손가(本孫家)의 초본과는 다소 다르게 실려 있다. 즉 《대동야승》에 있는 본서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초본인 《난중잡록》과 《속잡록》중에서 선조 임진년(1592) 8월부터 인조 6년 무진년(1628) 12월까지 부분을 〈난중잡록〉 제 1 내지 제 7 권으로 책정하여 《대동야승》 26권 내지 32권까지에 수록하였고,
2. 인조 6년 12월부터 동 9년(1631)년 5월까지의 기사를 〈속잡록(續雜錄)〉이라는 표제로 《대동야승》 제 32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
3. 인조 9년 6월부터 동 13년(1635)까지의 기사를 다시 〈난중잡록〉이란 명칭으로 《대동야승》 제 33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
4. 인조 14년(1636) 1월부터 15년(1637) 3월까지의 기사를 다시 〈속잡록〉의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3 권 후반에 수록하였고,
5. 인조 15년(1637) 4월부터 동 16년(1638) 12월까지의 기사를 또 다시 〈난중잡록〉의 이름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전반에 수록하였으며,
6. 끝으로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17년(1367년 명 태조(明太祖) 홍무(洪武) 원년)부터 조선 왕조 선조 원년(1568년) 사이에 우리나라가 명 나라, 일본, 기타와 서로 교섭하였던 외교 즉 사대 교린(事大交隣) 관계의 기사를 상세히 기록하여 〈역대요람(歷代要覽)〉이라는 명칭으로 《대동야승》제 34 권의 후반에 싣고서 이 책을 완결시켰다.

이상과 같이 되어 있으므로 《대동야승》중에는 초본 제 1 권의 선조 15년(1582년) 임오년부터 동 25년(1592년) 임진년 7월까지의 기사가 전부 탈락되었고, 저자가 정한 〈난중잡록〉이란 명칭은 광해 2년(1610년) 경술년까지의 기사에 그쳤는데 여기에는 인조 6년(1628년) 무진년까지 그 명칭으로 내려오다가 그 다음부터는 〈속잡록〉이란 명칭과 한 편씩 교대하여 사용하여 저자가 원래 편집한 순서를 문란케 하였다. 그리고 권말의 〈역대요람〉은 초본에는 없는 것을 《대동야승》에만 부록되어 있다. 이《대동야승》의 내용을 보면, 현재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필사본인 원본 중에도 오자 탈자 등이 많고 그 편집이 조잡함을 볼 수 있는 것이나, 금번 본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대동야승》의 국역을 단행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본가에서 간행한 원본 중에서 제 1 권 기사와 여러 사람의 서문ㆍ발문ㆍ간행사 등 《대동야승》에 탈락된 것을 추가 등재하였으며, 원본에는 실려 있지 아니한 〈역대요람〉 1편도 전과 같이 수록하여 〈난중잡록〉 4권 〈속잡록〉 4권, 부록 1권으로 완전한 편집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 당시에 표기한 명칭 이외에 전체를 총괄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어서, 이조 중기 전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정치ㆍ문화ㆍ사회ㆍ당쟁ㆍ외교 등 관계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규장각 도서로 보존된 등사본을 대본으로 《대동야승》에 수록되어 고서간행회에서 간행을 보았고 그 후 수십 년을 지나서 저자의 후손가에서 8권 4책으로 원본 간행이 되었으나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일반의 해독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던 바 지금 국역본으로 세상에 펴게 되었으니 지극히 다행으로 아는 바이다.

1971년 7월 30일


亂中雜錄[第一]

壬辰上 萬曆二十年。宣祖二十五年。

如光州則朴君光玉。奔走開諭。收拾散亡。令賤子從厚。因厚分領。到水原戰所。交付于光牧。是時。巡察。在道遲回。

2023.6.16.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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