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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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李潑, 1544~1589)

이발(李潑, 1544 ~ 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이다. 제학 이중호(李仲虎)의 아들이며, 네 형제 중 둘째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중후하고 엄정하였으며, 질박하고 성실하였다고도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연에서 왕도를 진달하고, 기강을 진작하고, 정도와 사도를 분별하려 하였으나, 시비를 가리고 인물을 비판하기를 좋아하여 원망을 사기도 했다.

윤의중의 사위로 고산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문과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렀고, 동생 이길(李洁)도 별시 을과에 아원(2등)으로 급제하여 응교에 이르렀으나,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둘 다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이발은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고, 또한 북인에 속했다. 정여립을 편들고 친하게 지낸 것이 기축옥사에 연루되는 원인이 되었으며, 형제의 죽음에 이어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고문으로 죽어 동인들이 원망하였고, 이는 동인의 남북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발과 그의 형제들이 과거에 급제할 때 마을사람들은 이 아름드리나무에 북을 걸어두고 축하연을 열었다. 하지만 축하의 노래가 울려 퍼지던 괘고정수의 가지는 수십 년 후 모두 말라 죽고 만다. 이발이 기축옥사에 휘말리면서 멸문지화를 당했기 때문이다.
호남사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기축옥사는 1589년 선조에게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올라가면서 시작된다. 전주의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2년(1570년)에 문과에 급제해 예조좌랑과 수찬자리에 올랐던 정여립은 동인이었지만 선조의 눈 밖에 나서 낙향해있던 처지였다.

낙향한 후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계원들과 토론을 자주 하고, 활을 쏘거나 무술을 연마했다. 1587년에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했을 때,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왜구를 물리치는 데도 공을 세웠다. 이 사건은 대동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게다가 정여립은 당대 성리학적 가치관을 넘어서는 진보적 가치관의 소유자였다. ‘천하는 공물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을 주장했다고 한다. 급진적 사상과 광범위한 조직을 지닌 정여립의 움직임은 모반으로 엮을 좋은 구실이 됐다. 동인 정여립이 모반을 꾀했다는 사실에 서인들은 술렁거렸다. 동인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다는 우려가 서인들 사이에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 역시 동인의 정치력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관찰사의 고변을 받은 선조는 곧바로 체포령을 내리고, 정여립은 체포 직전 아들과 함께 칼을 품고 자결을 한다. 혹자는 자결이 아니라 군졸에 의해 살해됐을 것이라고도 추측한다. 도망갈 의향 이었으면 군졸이 어디로 닥칠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 왜 죽도에 있다 자살을 했겠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다. 정여립의 집터는 파헤쳐지고, 그 자리에 못을 만들어버렸다. 그 땅에 풀 한포기도 자라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여립이 역모를 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곧이어 역모에 가담한 자를 발본색원하기 위한 대규모 국문이 시작됐다. 역모사건수사의 총책임자는 낙향하여 정치적 복귀만을 학수고대하던 서인의 영수,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었다.


“사형과 단근불로 매우 참혹하게 국문하였다.”
- 『기축록』
“정철이 기축년에 많은 그물과 함정을 만들었다.”
- 『선조실록』
“(정철이)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일망타진했다.”
- 『선조실록』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많은 가사와 시문을 지은 문학인으로 기억되는 송강 정철, 하지만 정치인 정철은 기꺼이 피바람의 칼잡이가 됐다.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서간, 정여립과의 평소 교류 등을 이유로 수많은 선비들을 국문했다. 자그마치 3년에 걸친 대대적인 색출작전이었다. 동암 이발도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유배를 간다.
본래 이발과 정철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동서 당쟁의 한복판에서 앙금이 쌓였다고 한다. 칼자루를 쥔 정철과 정치적 갈등 관계는 물론 사감까지 좋지 않았던 이발의 불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동생 이길, 이급도 체포가 되고, 백유양, 조대중, 유몽정, 최여경, 윤기신, 이진길 등 당대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모조리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죽어나갔다. 영의정 노수신과 우의정 정언신, 홍종록 등 동인에 속하는 관료들도 파직이 됐다.

고문 중에 다른 이를 발고하면 살려준다고 해서 국문장에서는 마구잡이 발고가 계속 됐다. 누군가 이발을 역모가담자로 발고하면서 유배지에서 국문장으로 이발이 압송된다. 온 몸의 살이 발려나가는 극형 끝에 이발은 죽음에 이르고, 그의 팔순노모와 여덟 살 아들도 극형을 당한다.

최희남 등 성균관 유생들이 이발은 ‘무고를 당했다’며 상소를 올렸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발의 형제는 물론 아들과 사위, 사촌동생까지 죽어나가면서 집안은 거의 멸문에 이른다. 기축옥사가 마무리되던 1591년, 이 살육의 광풍에 죽어나간 선비의 수는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


“대단한 죄가 아닌데도 백성들이 연좌되어 감옥이 가득차고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 김천일 상소 중


정철을 앞세워 동인 세력을 주저앉힌 선조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죄를 정철에게 전가하기 시작한다.


“사독한 정철은 천고의 간흉이라, 간악한 정철로 인해 어진 신하를 잃었다”
- 『선조실록』


정철이 광해군 관련 건의를 한 것을 핑계삼아 선조는 정철을 파직하고, 위리안치형에 처한다. 빈곤과 질병에 신음하던 정철은 유배지에서 비참한 생을 마친다.

호남 인재가 죽어나가고 향촌사회가 찢겨나가는 기축옥사는 이발 가문의 불행이었을 뿐 아니라 호남의 인재가 모조리 죽어나간 아픈 역사였다. 중앙에서 벌어진 권력쟁탈전과도 양상이 달랐다. 복수가 복수를 부르고, 향촌사회를 증오와 갈등으로 갈갈이 찢어버렸다. 끝을 모르는 증오의 정치는 그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아픈 교훈을 전해준 끔찍한 일이었다.
한편 종의 아들과 옷을 바꿔 입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길의 아들 원섭은 본관을 숨긴 채 살아남았다.

광해군 때에 이발의 죄는 정여립과 친한 것뿐이라 하여 여러 차례 신원을 요청하였으나 선대 임금의 결정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인조 2년(1624년)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고,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년)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1694년 이발의 멸문지화가 모함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신원이 회복되자 이발의 후손들은 비로소 제 이름을 밝힐 수 있었다.
놀랍게도 죽은 듯 보였던 괘고정수에서도 새로 잎이 났다고 한다. 현재 괘고정수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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