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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벽진나루

세종실록에는 광주의 나루터로 북구 용두동의 거진巨津과 함께 서구의 벽진碧津을 이야기한다. 벽진나루가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편에 광주 옛 무진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무등산은 진산이며 벽진도와 거진도가 있다고 했다.

군의 서쪽에 있는 벽진나루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광주 관아와 그 서쪽의 전라병영을 연결하는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언급됐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현재의 극락교 아래에 벽진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벽진나루는 생압도生鴨渡 또는 생압진生鴨津으로도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읍지를 보면 벽진과 생압도는 거의 같은 위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됐고 하나의 나루터를 다르게 불렀을 가능성마저 있다.


벽진과 다리 생압도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이견은 크게 두 가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황룡강의 유로를 설명하면서 옛 내상성 남쪽을 거쳐 생압도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장성에서 흘러든 황룡강이 광주에 이르러 생압진으로 유입한다고 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생압진은 황룡강가, 광주와 장성 경계선의 어느 지점으로 해석된다. 19세기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생압도가 지금의 장성군과 광주광역시 경계를 지난 어느 지점에 있는 나루터로 묘사했다. 대동여지도가 묘사한 생압도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을 따른 결과로 보인다. 그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동여지도와 달리 대다수의 기록들은 오히려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같은 지점에 있었고 그 위치를 광주 관아로부터 서쪽 20리 혹은 30리에 있다고 했다. 황룡강가의 나루로 보기에는 거리상 큰 차이가 있다. 이 나루와 똑같은 이름의 동네가 지금까지 사월산 주변에 있다.

이런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생압도는 영산강 본류 구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6세기 서구 매월동 전평제를 만든 만든 회재 박광옥의 시를 근거로 들 수 있다. 박광옥은 풍영정의 건립자인 김언거와 교분이 두터웠다. 둘의 관계를 언급하며 생압진과 칠수가 잘 통했으며 좋겠다.”는 시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다정했던 옛 친구들을 풍영정에서 만난다는 기쁨이 커서일까 / 생압진에서 칠계로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지네.”

이 시에서 생압진은 박광옥 자신을, 칠계는 풍영정 일대에서 영산강을 부르던 이름인데 이는 동시에 김언거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어떻든 이 시는 벽진의 또 다른 이름이 생압진이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생압진은 생압도와 같은 말이고 칠수는 칠계의 별칭이다. 이 시는 평소 나룻배를 통해 생압도와 풍영정 나루를 오가던 박광옥이 부득이 한 사정으로 풍영정에서 열리던 모임에 불참한 일을 두고 애석해 하며 쓴 것이었다. 어떻든 생압도가 영산강변, 특히 벽진동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생압진이 벽진동에 있던 나루터였을 가능성은 다른 기록에서도 보인다. 광주읍지(1879)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생압교生鴨橋는 광주 관아로부터 20, 당부면當夫面에 있다.” 여기서 생압진을 생압교라 한 것은 조선시대에 나룻목의 수심이 낮아지면 다리를 놓는 관행에 맞춰 나룻목이 다릿목으로 바뀐 데서 비롯된 것이다. 무엇보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을 비롯한 마륵 금호 풍암 매월동을 포함한 옛 지명이었다.

생압진이 벽진동에 있었을 가능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생압진은 조선시대에도 왕왕 장압진이나 장애비, 혹은 장암으로 발음되곤 했다. 또한 이 일대를 장애비또는 장암등으로 부르는 관행이 있고 지금도 일부 사람들은 극락교를 장압교또는 장애비다리라고 부른다.

이런 지명은 옛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된 19세기에 작성된 비변사인 방안지도에는 생압진을 장압도莊鴨渡로 표기하고 있다. 생압진, 장압도, 장애비는 같은 곳을 지칭했고 이는 지금의 벽진동 일대에 포함되는 곳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장압진은 술방(북서쪽) 20리에 있는 당부면에 있다.” 당부면은 지금의 벽진동, 마륵동, 금호동, 풍암동을 아우르던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이 생압도를 벽진동에 있는 나루로 여겼다는 또 다른 근거이다.

마지막으로 벽진과 생압진이 거의 동일한 나루였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있다. 사월산 근처 상촌마을은 옛날 역촌이었단 말이 구전으로 남아 있다. 상촌마을은 사월산의 동쪽, 즉 공군화약고와 인접한 마을이다.


*위성지도로 본 사월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전라병영이 광주에 있었던 예전에 진원역鎭原驛이 있었다. 태종 17년에 내상을 강진에 옮길 때 아울러 옮겼다.” 또 같은 책의 강진군 내용을 보면 진원역은 본래 광주의 내상 북쪽에 있었는데 태종 17년에 내상을 도강현, 즉 강진으로 옮기면서 따라 이설했다.”고 적고 있다. 전라병영이 강진으로 이설되면서 역촌도 덩달아 따라 갔다는 얘기다.

한때 벽진이란 나루, 통신과 연락을 위한 기관인 역촌, 그리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던 전라병영이 한 세트를 이루며 이 일대에 있었다는 뜻이다.

생압도의 역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지금처럼 오직 다리가 놓인 곳으로만 기억된 것은 20세기가 되면서부터였다. 1910년대 철도역을 근간으로 송정리가 광주의 관문으로 부상하면서 송정리와 광주 시내를 잇는 신작로가 놓였는데 이 때 어지간한 홍수에는 쉽게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가 가설됐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루터의 오랜 전통은 사라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은 나루터가 아니라 그 기억을 딛고 선 다리인 극락교 뿐이다.

처음 이곳에 극락교의 전신이라 할 다리, 즉 차량이 통과할 만큼 큰 다리가 생긴 시기는 정확히 짚어 말하기 어렵다. 송정역이 영업을 시작한 1913년에 맞춰 광주~송정리 간 영업용 승용차가 처음 통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대략 그 무렵부터 차량통행이 시작된 듯하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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