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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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집 제4권 / 묘갈(墓碣); 임훈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 갈명(碣銘)

생의 휘는 훈(薰)이요 자는 중성(仲成)이다. 그 선대는 은진현(恩津縣) 사람이다. 자이당(自怡堂)이라고 자호하였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葛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고사옹(枯査翁)은 최후에 스스로 고친 호이다.
고려조 태상박사(太常博士) 휘 성근(成槿)의 후예로, 우리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정(梃)은 벼슬이 군사(郡事)에 이르렀으며, 아들 식(湜)은 별장(別將)을 지냈는데 함양(咸陽)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 아들 휘 천년(千年)은 현감을 지냈고 다시 안음현(安陰縣)으로 옮겼는데 바로 선생의 증왕부(曾王父)이다. 조(祖) 휘 자휴(自庥)는 사용(司勇)을 지냈다. 고(考) 휘 득번(得蕃)은 진사를 지냈는데, 성품이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지조가 고결하여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구인재(求仁齋) 정우(貞祐)의 후손이자 참봉 수경(壽卿)의 딸이다. 홍치(弘治) 경신년(1500, 연산군6) 7월 15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착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나이 5, 6세 때 큰형이 돌림병을 앓아 진사공(進士公)이 이웃집으로 피해 갔는데 선생이 남아서 병을 구완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밤이면 들어가서 간호를 하고 낮이면 반드시 밖에서 기다리는 등 진사공이 피접(避接)한 곳에는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고 오직 안부만을 살폈다. 그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이러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글을 읽을 줄을 알았고 외울 줄도 알았다. 15, 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글짓기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표현하는 언사(言辭)에 이미 문장의 체계가 있었다. 병술년(1526, 중종21)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아래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부친의 안부를 살피는 일 말고는 발길이 여막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정과 예문을 다 갖추었으며 정성과 효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가정(嘉靖) 경자년(154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부친을 위하여 누차 성균관(成均館)에 몸담았다. 비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또한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성균관 안의 유생들이 모두 선생에게 도가 있는 줄을 알고 선생과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간간이 부박한 무리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을 꺼려하여 교묘하게 그 하자를 찾고자 하였으나 끝내 한 점도 찾아내지를 못하였다. 이는 대체로 그 후한 덕과 훌륭한 행실로 파고들 하자가 본디 없었던 것이지 꾸미거나 의도적으로 바로잡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계축년(1553, 명종8)에 관천(館薦)으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니, 선생이 어버이의 권고로 하는 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에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으로 옮기고 또 명년에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으로 옮겼으나 선생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때 진사공의 나이가 이미 80세였다.
선생이 아우 참봉공(參奉公)과 함께 좌우에서 모시면서 온갖 가지로 봉양을 하였다. 온화한 기상과 좋은 얼굴로 이목(耳目)과 심지(心志)를 즐겁게 해 드리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한갓 음식만 봉양할 뿐이 아니었는데, 신유년(1561) 여름에 진사공이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선생의 형제가 반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막상 유명을 달리하고 나자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하마터면 위태로울 뻔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장사를 지낸 후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하루에 세 차례 상식(上食)을 하고 곡(哭)은 반드시 애절함을 다하였다. 당시에 선생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지만 꿇어앉아서 절하는 고생을 그만두지 않았다. 비록 심한 추위나 무더운 여름에도 상복(喪服)을 항상 몸에 입고 있었으니, 비록 옛날에 거상(居喪)을 잘한 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상복을 장차 벗으려 할 때에 현감(縣監)이 선생 형제의 효행에 대하여 고을의 여론을 들어 본도(本道)에 보고하고, 본도에서 고을의 체문(帖文)을 들어서 치계(馳啓)하니, 이듬해인 갑자년에 상이 선생 형제에게 정려문(旌閭門)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상이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이 잘 닦인 사람을 선발하여 6품 관직을 초급하여 수여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그 선발을 주관하여 여섯 사람을 얻었는데 선생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병인년(1566)에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선생이 은명(恩命)에 감격하여 즉시 사은(謝恩)하러 나섰으나 가을 더위가 극성을 부려 길에서 병이 나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상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을 지어서 내려 보내도록 하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또 서늘한 가을이 되거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9월에 전지(傳旨)를 내려서 여섯 사람 모두 역마를 타고 대궐로 입궐하게 하였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고 정치하는 도리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임금이 정치하는 방법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는 이것으로 팔조목(八條目)의 근본을 삼고, 《중용(中庸)》에서는 이것으로 구경(九經)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에도 그 근본이 있으니, 진실로 그 근본을 알지 못하면 학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께서 전적으로 자신을 수양하는 도리에 힘쓰시어 끊임없이 노력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법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난 뒤에 상이 아뢴 말을 직접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정무를 마치고 난 한가한 시간에 보기 위한 것이었다. 상이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내렸다.
부임하고 나서 고을의 잔약함과 백성들의 폐해를 깊이 우려하던 차에 융경(隆慶) 원년(1567)에 재이(災異)에 관한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국가의 형편을 보건대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세자(世子)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어서는 안 되는데 세자를 아직 정하지도 못하였고, 조정(朝廷)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탐오하는 풍토가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학교의 교육이 황폐해지고 국경의 방어가 소홀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염려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신(大臣)이 이미 아뢰었고 시종신(侍從臣)이 이미 진달하여 성상께서도 응당 익히 생각하셨을 것이니 소원하고 보잘것없는 신까지 굳이 성상께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다만 보잘것없는 신이 보고 들었던 것 가운데 잔약한 고을의 절실한 폐단을 우선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여섯 가지 폐단을 들어서 제시하고 맨 끝에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아뢰기를, “신이 진달한 여섯 가지 폐단을 원컨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시고 대신과 의논하여 잔약한 고을의 백성으로 하여금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고 뼈만 남은 자에게 살이 돋게 하신다면 보잘것없는 신은 분수에 맞게 마땅히 시골로 물러가서 평소에 간직했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이니, 이 역시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상께서 특별한 관심 없이 의례적으로 해조에 내리신다면, 해조에서는 필시 국가의 상전(常典)을 한 고을만을 위하여 가볍게 고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잔약한 고을이 더 이상 소생할 리가 만무하니, 구제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뒤에는 아무리 구제하고 싶어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큰 나무가 넘어질 적에 뿌리가 먼저 뽑혀 넘어진다.’ 하였는데, 신은 아마도 뿌리가 뽑혀 넘어지게 되는 것이 먼저 언양(彦陽)으로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해조와 대신에게 명하여 일일이 거행하게 하고 또 본도 감사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언양 현감 임훈(林薰)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건대,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조목조목 폐단을 진달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경은 이 뜻을 본현(本縣)에 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선생은 사직하고 돌아왔고, 그 뒤에 대신이 의논하여 네 가지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선묘(宣廟) 기사년(1569, 선조2) 겨울에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보임되었는데, 하직하던 날에 상이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 묻기를,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외우게 하는 것은 규례에 불과하다. 그대가 학행(學行)이 있다고 들었으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하니, 선생이 먼저 겸손한 말을 올리고 또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이황 같은 현자가 좌우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퇴계 선생이 고향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아뢴 것이다. 물러난 뒤에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다가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무더운 날이 머지않아서 호초를 하사하는 것이니 잘 가도록 하라.” 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하사하였다. 부임한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병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제수하였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승직하고, 수직(守職)으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니, 마지못해 소명(召命)에 따랐다. 10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제수하니, 선생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피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아 이에 부임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부역이 균등하지 않은 것을 우려하자 선생이 즉시 전부(田簿)를 다시 기록하여 그 부역을 균등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그 밖에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줄이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고을에 있던 날에는 관디를 갖추고 관아에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곤 하였는데, 만약 하루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마음이 언제나 편치 않았다. 그 후 2년이 지난 갑술년(1574)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을해년(1575) 겨울에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봉사(封事)를 올려 사례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종묘사직의 다행이며 신민의 다행입니다.” 하였고, 또 우(禹) 임금의 읍고(泣辜)와 탕(湯) 임금의 축망(祝網)의 고사를 들어서 아뢰기를, “대저 우 임금과 탕 임금이 능히 은혜를 미루어 정치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근본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은혜를 미루지 못하여 구차한 실책을 면하지 못한 것은 역시 마음에 근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 임금과 탕 임금으로 법을 삼고 한나라와 당나라로 경계를 삼아서 근본을 다스리고 은혜를 미루어 확대하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이 선왕조 때에……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일입니다.” 하였다. 말미에는 적군(籍軍)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요의 폐단에 대하여 아뢰기를, “그 폐해의 심하기가 항우(項羽)나 부견(符堅)이 지나간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그 당시 어사들이 저지른 가혹한 참상을 심하게 말한 것으로 사림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상소가 주달되자 상이 매우 칭찬하였다.
정축년(1577)에 재차 장악원 정을 제수하였는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니,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또 봉소(封疏)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마침 양전(量田)에 관한 조치가 있었고, 또 호강(豪强)한 자를 적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선생이 사안별로 논열하면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였다. 그 말에, “국가가 실시하는 일이……이 어찌 고인(古人)이 하신 반구(反裘)의 경계를 알겠습니까.” 하였다. 가을에 또 쌀을 하사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임오년(1582) 여름에 특명으로 통정(通政)을 가자하고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삼으니, 즉시 봉사(封事)를 올려 첫머리에 분수에 넘치는 품계라서 받기가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군민(軍民)의 폐단을 덧붙여 아뢰기를, “삼가 오늘날의 폐단을 보니……도망가거나 흩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아, 임금의 한마음은……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판결사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기 어려우므로 체직하겠지만 가자(加資)한 것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또 덧붙여 헌의(獻議)한 말을 보고는, “내가 그대의 지극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갑신년(1584) 1월 임인일에 병환으로 외침(外寢)에서 임종하니, 향년 85세였다. 이보다 앞서 본도(本道)에서 선생의 병환에 대하여 치계(馳啓)하였는데 별세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어의(御醫)가 약을 가지고 왔고,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하도록 명하였다. 4월 기유일에 집의 북쪽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
아, 선생의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는 선친(先親)이 뇌장(誄狀)에서 남김없이 진술하였으니, 아들이자 후학(後學)인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다만 선생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들어 보면, “하늘이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자질을 선생에게 부여하였고, 선생은 그것을 받아서 몸에 간직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80여 년을 때묻지 않고 상하지 않게 고이고이 간직하다가 온전한 채로 돌아갔다.” 하니, 이 말은 덕을 아는 자의 말이라 하겠다. 그가 부여받은 것이 중후하고 순수하였으므로 발현되는 것이 순전하고 아름다웠던 것이며, 용모와 언사에 나타난 것이 온후하고 화평하였으며 맑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평소에 말을 급하게 하거나 조급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일찍이 거칠거나 사나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 하여 으스대지 않았으며 혼자 있을 때라 하여 태만하지도 않았다.
이를 통해 가정에서는 부모를 섬길 때 정성과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종족에게 인자함을 베풀고 처지가 어려운 자는 돌보아 주었다. 향당에서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돈후하고 질박하기를 힘쓰고 신뢰와 의리를 숭상하여 일찍이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의 덕에 심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임금을 섬길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는 말과 조목조목 따져 진달하는 말이 한결같이 올바른 것들이고 공리(功利)나 잡다한 술책에 관한 것은 없었으니, 이는 모두 맹자가 말한 “인(仁)과 의(義)가 아니면 진달하지 않는다.”와 주자(朱子)가 배운 네 글자의 뜻에서 나왔다.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청렴[淸]과 신중[愼]과 인자[慈]와 용서[恕]를 바탕으로 하여 진실만을 추구하고 외형을 꾸미지 않았으며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백성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않았으므로 일 년 내내 헤아려도 남을 만큼의 공적이 저절로 쌓였다. 맹자가 이르기를, “근본이 있는 자라야 이와 같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은 이미 근본이 있으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척척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선생이 어찌 명분(名分)에만 집착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분이었겠는가. 선생의 실생활을 보면 비스듬히 기대지 않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용모를 공손히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표정도 장중하게 갖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단정하고 중후하게 하기를 힘쓰고 예사로운 말이나 행동도 반드시 신중히 하였다. ‘성경(誠敬)’이란 두 글자와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思無邪]’와 ‘자신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毋自欺]’ 등의 문자를 창가와 책상에 크게 써서 걸어 두고 항상 가슴에 새겼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다가 피곤하면 잠시 궤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면 다시 책을 보았다. 언제나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늙을수록 더욱 부지런하였다.
항상 참봉공(參奉公)과 밤낮으로 담론(談論)을 벌인 것이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을 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옛사람의 시비와 득실에 대한 문제와 세도(世道)가 오르내리고 쇠퇴하거나 융성하는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논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는 모두 의리로 귀결시켰다. 항상 후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매번 전날에 한 일을 되돌아 생각해 보고 두렵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늙어서도 여전히 그렇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은 평소에 한 일을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고 안으로 자신을 살펴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한 공부가 거원(蘧瑗)과 온공(溫公)의 기풍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선생이 지은 문장은 넓은 바다처럼 광범위하여 무궁한 뜻을 담고 있어 참으로 경서(經書)와 같은 글이었고 꾸밈없는 소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
아, 하늘이 선생을 낸 것이 진실로 의도한 바가 있었으니, 만약 묘당(廟堂)에 앉아서 백관(百官)을 진퇴시키고 임금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임금의 덕을 보좌하도록 하였더라면 어찌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지 못하였겠으며 국가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지 못하였겠는가. 애석하게도 그 도(道)가 시운(時運)과 서로 맞지 않아서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비록 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조그만 백 리 정도의 지역에서 그럭저럭 감서(監署)하는 직임을 맡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그 뜻을 만분의 일이나마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을 사람들의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아서 선생의 형제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의 사당에 배향하여 제사를 모셨으니 백세 이후에 반드시 풍교를 듣고 흥기할 자가 있을 것이다.
선생은 고양 유씨(高陽兪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낸 뇌계(㵢溪) 선생 호인(好仁)의 손녀이다. 부인의 아버지는 진사 휘 환(瑍)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인데 망기당(忘機堂) 한보(漢輔)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순후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남편을 도와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생보다 13년 먼저 졸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위의 두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으며, 딸은 군수 이구인(李求仁)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일찍 죽고 후사가 없다. 3남 승조(承祚)는 훈도(訓導) 신준(愼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상(眞㦂)이며 2남은 진흠(眞????)이며 3남은 진준(眞惷)이다. 진상은 사인(士人) 하세보(河世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사인 주국신(周國新)에게 시집갔다. 진흠은 사인 신희양(愼希讓)의 딸에게 장가들고 진준은 장가들지 않았다. 2녀는 동지 한형(韓詗)에게 시집가서 아들과 딸 약간 명을 두었다. 선생이 별세한 후에 세 손자가 모두 자식이 없이 죽고 진상만 단지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정홍서(鄭弘緖)와 손작(孫綽)이 그 사위이다. 정홍서의 처가 후사가 없이 일찍 죽고 딸 하나만 두었는데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손작은 자녀 아무개를 두었다.
선생의 총부(冢婦)가 종사(宗祀)를 이어 갈 주인이 없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선생 중씨(仲氏)의 손자인 진무(眞懋)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진무는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 아무개를 낳았다. 진무가 선생의 묘정에 세울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시일을 끌다 보니 아직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항상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전에 읽던 글을 정리한다면 아마도 불후(不朽)의 전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날 국가의 운명이 이미 다하고 도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지존하신 임금을 모시고 고립된 성으로 들어가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 한번 죽는 것이야 한스러울 것이 없지만 명현(名賢)이 이룩한 공적을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되어 포석(炮石)이 날리는 가운데에 삼가 대략을 위와 같이 간추려 싣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숭고한 덕의 언덕 / 崇高德岳
저 높이 하늘에 닿겠네 / 峻極于天
신령한 기운을 빚어내어 / 釀靈毓秀
우리 명현을 내셨네 / 生我名賢
그리운 우리 선생은 / 我懷伊賢
금옥 같은 아름다움과 / 玉潤金精
강하 같은 도량에다 / 江河之量
난곡과 같은 모습이라 / 鸞鵠之形
봄바람이 자리에서 이는 듯 / 春風生席
화기가 넘쳐흐르는 듯 / 和氣敦薄
효도와 공경으로 / 惟孝惟悌
가정을 다스리고 / 居家之政
충성과 신뢰는 / 曰忠曰信
타고난 성품이었네 / 本然之性
정성으로 사물을 접하고 / 誠以接物
공경으로 몸을 간직하고 / 敬以持身
성리를 연구하고 / 硏窮性理
경전을 탐구하고 / 探討典墳
잘못을 알아서 고쳐 가기는 / 知非遷改
거백옥의 기풍이요 / 伯玉之風

남을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기는 / 對人無愧
사마군실의 공부였네 / 君實之功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섬길 때는 / 入以事君
맹자의 공경과 주자의 학문을 따르고 / 孟敬朱學
나가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 出而莅民
봄날 우로의 은택을 베풀었네 / 春噓雨澤
하늘은 이미 풍부하게 부여하고서 / 天旣富與
어찌 크게 시험하지 않았는가 / 胡不大施
조그만 백 리 지역이라니 / 栖栖百里
그것도 백발이 다 되어서 말이지 / 白髮衰遲
난들 어찌 비난할 수 있으랴 / 吾何譏乎
시운에다 돌릴 뿐이네 / 歸之於時
산이 바다 되고 골짜기가 구름으로 변하더라도 / 山移谷變
이름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名不可夷
[주-D001] 수령칠사(守令七事) : 
수령이 수행해야 할 일곱 가지 임무로서, 즉 농상을 활성화하는 것[農桑盛], 호구를 증대시키는 것[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學校興], 군정을 잘 다스리는 것[軍政修],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賦役均], 사송을 간소화하는 것[詞訟簡], 간활한 자가 없게 하는 것[奸猾息]을 말한다. 《六典條例 承政院》
[주-D002] 이황 …… 선생이 : 
이 부분은 원문의 생략으로 인해 전후의 기사 내용이 서로 연계되지 않으므로 《동계집》 초간본에 따라 일부 보충하였다. 보충한 부분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如滉之賢 不宜去離左右 蓋是時 退溪先生方”
[주-D003] 읍고(泣辜) : 
우(禹) 임금이 죄인이 많은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울었다는 말로,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우 임금이 거리에 나갔다가 죄인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위문하며 울었다.” 하였다.
[주-D004] 축망(祝網) : 
탕(湯) 임금이 들판으로 나가다가 사냥꾼이 그물을 사방으로 쳐 놓고 “모든 새들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고 비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다고 여겨, 세 군데를 터 놓고는 “피하기 싫은 새들만 이 그물에 걸리거라.”라고 빌었더니, 제후들이 듣고 그의 성덕을 찬양하였다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주-D005] 반구(反裘)의 경계 : 
경중과 본말을 알지 못한다는 비유에서 온 말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 〈잡사(雜事) 2〉에, “위 문후(魏文侯)가 길에서 모피 옷을 뒤집어 입고 꼴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털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문후가 ‘속가죽이 다 닳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처사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주-D006] 잘못을 …… 기풍이요 : 
거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로, 이름은 원(瑗)이며, 백옥(伯玉)은 그의 자이다. 그가, “나이 50세에 49년 동안의 언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는데, 임훈 역시 이러한 기풍이 있었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淮南子 原道訓》
[주-D007] 남을 …… 공부였네 : 
사마군실(司馬君實)은 송(宋)나라의 대학자로, 이름은 광(光), 호는 온공(溫公)이며, 군실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한평생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은 없으나, 한평생 해 온 일을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여기에서 인용한 뜻은 임훈에게도 그러한 공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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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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