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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의-충민공 전상의 신도비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

1972년




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때 구성부사 겸 좌영장인 전공 휘 상의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공이 평안병사 남이홍과 안주목사 김준과 같이 안주에 진치고 있다가 남 김 양공(兩公)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공은 백상루(百祥樓)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올 때 공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적의 세력이 저렇게 강성하고 우리는 밖에서 개미새끼만한 구원병도 오지 않으니 강약이 분명하고 수효의 많고 적음이 대등하지 않으니 전쟁을 이길 방법은 오직 군기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군기가 부족하니 함부로 남용하지 말라 당부하였다. 갑자기 적진에서 철갑을 입은 기병들이 달려오니 공이 군사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발사명령을 하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쏜 자가 있어 곧 베어 죽이니 일군이 놀라 숙연하였다.

이에 병기를 감추고 일부러 약세를 보이니 적군이 더욱 교만하여 바로 성 아래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공이 선봉에 발포 명령을 내려 전군이 일시에 계속 발포하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노병(虜兵)이 크게 무너져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이니 싸움에 이긴 여세를 타서 적병을 평야에서 크게 쓸어버렸다. 모든 군사가 재빨리 앞을 다투어 추격하고자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병사가 교만하면 패하는 것이니 적의 정세를 파악하기 어려움에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성벽을 견고히 지켜서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알맞게 처리하는 것이 병법가의 계책이다 하고 대오를 정비하고 망동치 못하게 엄중히 경계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자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병사는 미약하고 식량과 군기도 다되어 가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군졸과 더불어 여기서 순국할 것을 맹세했다. 이때 남공이 노병(虜兵)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잠시라도 그 세력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전공은 분연 대노하여 대의로써 남공을 꾸짖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다가 남공의 뜻이 실지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멈추었다.

연일 싸움을 격려하며 충의로 장사들을 권장하여 모두 죽기로 맹세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데, 남공이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자고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만일 먼저 방화를 하면 우리 남은 군사가 다 죽을 것이며 군기도 다 없어질 것이니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의 세력만 더 높게 할 뿐이다. 잔병을 수습하여 적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죽인 것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닌가? 싸우다가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진 뒤에 조용히 나가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

남이흥과 김준 부자가 마침내 불에 타 죽고, 군졸과 병기가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전공이 남은 병기를 수습하여 누중(樓中)에 두고 장사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병기와 식량이 다 떨어지고 후원군은 오지 않고 중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천명을 어찌 할 것인가? 너희 장사들이 있어 보았자 어찌할 수 없다. 너희들은 속히 생명을 도모하여 지체 말고 나가거라. 관교 배상증과 백유정이 머뭇거리며 차마 공만 남겨 두고 갈 수 없어 배회하고 가지 않으니, 공이 크게 꾸짖어서 내보냈다.

홀로 백상루 위에 서서 활을 들어 적을 쏘면서 일현(一弦)에 화살 3개를 매겨 적을 향하여 쏘아 대니 화살이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적의 화살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화살이 공의 좌측 정강이에 맞아 화살을 뽑아내니 살대만 빠지고 촉은 살 속에 박혀서 나오지 아니하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납시공생(納矢貢生)을 주며 살을 헤치고 촉을 빼라 명하고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연속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화살은 없어지고 힘이 다하여 공이 서울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칼을 뽑아 자문(自刎)하여 백상루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그날이 정월 이십일일이다. 노병들도 놀래어 서로 말하기를 충신열사의 시체를 군중의 시신 속에 섞여 둘 수 없다 하고 루 앞에 매장하고 표를 세워 두고 갔다. 뒤에 광주 무등산에 예장하니 유좌이다.

이 일을 조정에서 듣고 자헌대부병조판서의 증직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숙종 갑자(1684)년에 정려를 명하고 그 이름을 충신지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주 충민사에 배향하고 광주 경열사에 추향하였으니 조정의 포상과 사림의 은덕을 보답함이 또한 지대하였다.

공은 천안인이니 백제 십제 공신 환성부원군 휘 섭()이 그 시조이고, 본조에서 광주목사가 휘 구생(俱生)이 그 육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완()이고 조고(祖考)의 휘는 개()이니 참봉을 지내었고 고()의 휘는 용()이니 증 승지이다. 공은 만력 을해(1575)년에 출생하여 계묘(1603)년에 중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는 증정부인 풍천임씨이니 묘는 합장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백원(伯元), 중원(仲元), 계원(季元)이고 손자는 유긍(有恆)과 유성(有成), 유장(有章)이다.

공이 훈련되지 아니한 군사를 거느리고 범과 이리와 같은 십만 적병을 대하고 보니 형세가 난처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고 살기를 돌아보지 아니한 그의 기특함을 알 수 있다. 계책과 사려가 공허하지 아니함이 없어 결국 몸을 희생하고 말았으니, 옛 현인들의 말이 대담하게 죽기는 쉬워도 조용하게 의를 취해서 죽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공은 이 두 기지를 겸하였으니, 이른바 죽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는 방법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순절한 것이 그 의의(宜義)에 합당함을 안다면 어찌 그 죽음을 아끼리오! 몸을 버림이 만일 그 장소를 얻었다면 열사가 그 존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 아름다운 일이다. 공은 일찍이 시와 예를 통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유고도 있어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다. 무식한 영웅이 없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다. 공의 후손인 광태(光兌) 광표(光表) 광로(光魯) 응팔(應八)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내가 일찍부터 공의 사절의 의의를 알고 있고 또 제 손들의 성의에 감격하여 병으로 사양을 못하고 이에 명하노라.

슬프다 전공은 남국의 기강이라.

시를 잘하고 예법도 잘 설명하여

옛날 극곡(郤縠)과 같도다.

심산에서 병서를 공부하고

궁술에 뜻을 두어서

무술로 몸을 닦아 신분을 발휘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었도다.

건노가 약속을 위반하고

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

긴 행렬로 달려드니

그 형세가 심히 웅장하다.

공이 구성에 병부를 갖고

좌영장이 되었더니

병기와 식량이 떨어져서

어떻게 할 계책이 없으나

공은 그 용맹을 다하여

계략을 뛰어나게 발휘하여

순국할 것을 맹서하고

극력 대항할 것을 말하고

뚜렷하게 계획을 세워

갑옷에 신체를 싸고 죽었다.

아름다운 옥은 부서지지 않고

굳은 정조가 훼손될 수 없다.

곰을 취하고 물고기를 버리는 것은

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의 큰 경륜을 세웠으니

응당 정령(精靈)이 있어

바람과 번개가 되어

재앙을 쓸어버리고

일월이 다 밝아졌다.

임금의 포창이 더 하여

높은 벼슬을 명하고

위로의 조사도 있었으니

삼충을 충민사에 병향하고

경열사에도 추향하였다.

여러 사림들이 상의하여

제찬(祭餐)도 만족하고

제미(祭米)도 풍부하니

천세 만세까지

무궁한 보은이로다.

무등산 묘소에

큰 비를 세우고

내 명을 깊이 새겨두니

길이길이 보전하소서.


숭정기원후 4신해(1851) 대사헌 당성 홍직필 짓고 전면 큰 글자는 능성 구철우가 쓰고, 신천 강인환이 쓰다.

단군 서기 4305(1972) 임자 음력 5월 하순 세우다.

天啓丁卯建虜引反賊姜弘立八寇時龜城府使兼左營將全公諱尙毅死之始公與平安兵使南以興安州牧使金浚同陣于安州南金兩公守中營公留陣百祥樓下賊兵漸邇公下令軍中曰賊勢甚盛而外絶蟻子之援强弱相懸衆寡不敵制勝之具專在軍械而以告乏愼不虚發俄而賊以鐡騎長驅公方整軍以待有不待令而先放銃丸者立斬之一軍警肅乃戢兵以示弱賊勢益驕馳突直扺城下公於是令先鋒一時放砲軍中鱗次繼放砲聲振天虜兵大壤僵尸山積遂乘勝大破之賊兵披靡平壤諸軍皆欲乘鋭遂之公止之曰兵驕則敗賊情難測不可輕進堅壁自守隨時應變是兵家之筭也嚴整行伍戒厥妄動翌日曉望賊兵籠郊絡野自四方流八者又不可勝數我兵單弱饗械俱罄公雪涕誓衆矢心立慬於是南公與虜講和盖欲少緩其鋒以有待也公奮然大怒責南公以大義欲拔劒斬之尋知南公之意不在於和乃止連日督戰忠義自勵將士皆以死自誓戰不旋踵南公欲放火自焚公止之曰若先放火則我軍餘者皆死而軍械消盡無益徒增賊勢未若收捨殘兵獲一醎猶勝於先斃必待兵矢俱盡然後從容就死未晩也南公及金公父子卒死於火軍卒及兵械己灰燼矣公收餘械樓中召將士抆淚而言曰兵食俱竭後援不至而中營己陷天實爲之奈爾將士何爾等速出圖生母用踟蹰官校裴尙增白惟精不忍捨公遲回不去公大叱放出獨挺立樓上張弓射賊一絃三矢發無不中賊矢如雨中其左股拔箭而鏃留在肥拔佩刀給納矢貢生剖肥出鏃連射之日己脯矢竆力盡公望京師四拜遂拔劒自刎墜于樓下而正月十七日也虜動色相語曰忠臣烈士之體不可雜於衆尸之中瘞樓前立表而去返葬于光州無等山酉坐事聞贈資憲大夫兵曹判書遺禮官致侑肅宗甲子命旌其閭曰忠臣之門配享于安州之愍忠祠追享光州景烈祠朝家之褒賞士林之崇報亦至矣公天安人十濟功臣歡城府院君諱聶其初祖也八本朝有諱俱生光州牧使寔公六代祖也曾祖諱琬祖諱漑叅奉考諱蓉贈承旨公生于萬曆乙亥癸卯中式年武科配贈貞夫人豊川任氏墓附有三子伯元仲元季元孫有恆有成公提不敎之卒當虎狼十萬之衆形格勢禁事無奈何而出萬死不顧一生斯已奇矣而出謀發慮罔不中窾竟以身殉曩哲云慷慨殺身易從容取義難公具此兩者是所云非死之難處死之難者也是知殞節苟合其宜義夫豈吝其殉捐軀若得其所烈士不愛其存於呼懿哉公早服詩禮力治文辭有零稿可傳世無不識字英雄云者詎不信哉公後孫光兌光表光魯應八請不佞以牲石之文不佞夙服公死綏之義又感諸孫苦誠靡敢以癃病辭遂爲之銘曰嗟嗟全公南國之紀敦詩說禮郤縠是似竆山讀兵厲志孤矢發身韎韋是爲君子建虜敗盟寇我西陲長蛇封豕其勢騤騤公握龜符爲左營帥兵食俱殲無計可施公奮其勇發謀出奇矢心殉國克抗厥辭定計於鮮衽革裹尸圭璧不碎堅貞靡虧熊魚取舎出自秉彝天地中間立我大經應有精靈化爲風霆掃盪腥氛日月雙明褒寵有嘉命秩斯隆有侐愍詞並祀三忠追侑烈廟詢謀僉同牲牢伊碩黍稷維豊有來永世崇報無窮有山無等石戴螭首我銘深鐫用垂不朽崇禎紀元後四辛亥

大司憲 唐城 洪直弼 撰

前面大字綾城 具哲祐 書

信川 康仁煥 謹書

檀君紀元四千三百五年壬子端陽月下浣 竪


충민사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淸)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安州城)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8년(1575)에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서구(西區) 구동(龜洞)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과 무술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끌려간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內禁衛) 예차(豫差) 및 어모장군(御侮將軍)을 봉직하였다.

인조(仁祖) 3년(1625)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겸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흐트러진 관위를 정비하고 변방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인조 5년(1627) 1월 청의 3만 대군이 쳐들어와 의주(義州)를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안주(安州), 평양(平壤)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安州城) 싸움 중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서 5일간 분전하다가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절(殉節)하니 적장(敵將)들도 충신(忠臣)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난이 끝난 후 2월 7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屍身)을 옮기어 동년(同年)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平頭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 장군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戰歿地)인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받들게 하고, 동(同) 10년(1684)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명하였다.

헌종(憲宗) 15년(1849)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와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헐리게 되었다. 본 사당(祠堂) 건물은 유적정화사업으로 1982년 6월 28일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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