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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 묘정비

광주시 광산구 광곡길 133 너브실마을

월봉서원 연혁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행장 등을 기록한 묘정비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기리는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선조 11)년 호남유생들의 공의로 지은 신룡동의 망천사(望川祠)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후 정유재란의 화로 피해를 입고 월봉산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1654년(효종 5) 월봉(月峰)으로 사액되었으나 1868년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훼철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1941년 현재의 위치에 빙월당을 짓고 1978년 증축을 거쳐 1981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봉은 본관이 행주로 아버지 진(進)과, 어머니 진주인 강영수(姜永壽)의 딸 사이에 광주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기준(奇遵)이 그의 삼촌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그는 소과는 물론 대과를 장원으로 급제한 엘리트코스를 밟고 조선조 학문의 최고 기관인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정통관료이자 올곧은 유학자이다. 특히, 이황과의 편지를 통한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은 조선유학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퇴계는 58세의 대학자이자 관직이 대사성인데 비해 그는 이제 갓 벼슬길에 나선 32살의 신출내기였다. 이러한 지위나 나이 차이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기주장을 펼치고 나중에는 서로가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이황의 사단, 즉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이(理)에서,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 욕(欲) 등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했다.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고봉집>, <논사록>·<주자문록> 등이 있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봉이 얼마나 퇴계를 존경했는지는 한편의 시 “꿈에 퇴계선생을 뵙다”에 잘 나타나 있다.

前夜依俙杖屨陪 지난밤에 어렴풋이 스승을 모시었고

今宵款曲笑談開 오늘 밤에도 정답게 웃고 말씀하셨네.

分明一念猶憂世 분명한 생각으로 아직도 세상걱정하시니

可識先生不著梅 선생께서 매화에만 집착 않으심을 알 수가 있네 


월봉서원 묘정비문 병서
 

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

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

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

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

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

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
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
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
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
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
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
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
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
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
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
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
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
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
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
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
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


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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