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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서 인견하다 - 명종 10년

전라도 방어사 김경석이 군관 남정을 보내 장계를 올리니 사정전에서 인견하다 - 명종 10년 을묘(1555) 5월 30일(계해)

전라도 방어사(全羅道防禦使) 김경석이 군관(軍官) 남정(南井) 보내 장계(狀啓)를 가지고 올라왔으므로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남정을 앞으로 다가오도록 하여 이르기를,
“서로 싸울 때의 일과 보고 들은 일을 자세하게 말하라.”
하니, 남정이 아뢰기를,
“당초에 왜적(倭賊)들이 영암(靈巖)에 와서 향교(鄕校)를 차지하고 있을 적에, 적장(敵將)인 자는 성전(聖殿)의 위판(位版)을 모시는 교의(交倚)에 앉아 명령을 내리고 있고 누른 빛깔의 기(旗)를 든 선봉(先鋒)인 자가 그 기를 낮추었다 높혔다 하여 마치 우리 군사를 부르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였고 또 칼과 창을 휘두르고 박수(拍手)치며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여염(閭閻)의 사람들이 모두 성 안에 모여들어서 처음에는 순찰사와 방어사가 내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들 이를 믿으며 안정되어 있다가 왜적들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장(主將)이 군관을 시켜 통유(通諭)하여 동요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군중(軍中)에 전령(傳令)하기를 ‘나아가 싸우는 사람은 살고 물러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없는가.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한결같게 가져야 한다. 물러서다 죽는 것이 어찌 나아가 싸워 살게 되는 것만 하겠는가.’ 하니, 한참 만에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안정되었습니다.
그 이튿날 왜적들이 모두 동문(東門) 밖에 모여 칼을 빼들고 날뛰며 위세를 보이므로 주장이 용맹스럽고 건장한 활 잘 쏘는 사람 15명을 뽑아 적들의 기세를 살펴보며 접전(接戰)하게 하려 하니 왜적들이 되돌아 서서 서로 희롱하는 짓을 하며 두려워하지 않는 모양을 보이었습니다. 우리 군사가 장전(長箭)을 쏘자 칼로 받아쳐 맞추지 못하게 하다가 편전(片箭)을 쏘자 왜인(倭人)들이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왜인들이 1위(衛) 1천여 명을 나누어 나주(羅州)의 통로를 가로 막고 우리 구원병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병사(兵使) 조안국(趙安國)이 영산진(靈山津)에서 변을 듣고서 오다가 왜적들의 침범을 받아 통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주(全州)의 효용군(驍勇軍) 6명과 함께 향교를 살펴보니, 왜장(倭將)이 위판 모시는 교의에 걸터 앉아 있기에 신이 편전을 쏘자 화살이 그가 앉아 있던 옆의 기둥에 맞았는데 우리 군사가 일시에 모두 쏘아 그의 왼쪽 다리를 맞추자 왜장이 칼로 자기 휘하(麾下)들을 치므로 칼에 맞은 사람들이 모두 다쳤습니다. 주장이 화전(火箭)을 쏘도록 했었는데 마침 서풍(西風)이 크게 일어 화전이 빠르게 나가므로 승세를 타고 쫓아가니 왜적들이 모두 향교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비 오듯 하자 적들이 드디어 기세를 잃고 무너져 도망하므로 인하여 적의 머리 1백 4급을 베고 또 패하여 도망하는 적을 쫓아가 6급을 더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신이 나올 때에 좌도 방어사(左道防禦使) 남치근(南致勤) 및 병사 조안국은 패하여 도망하는 도적을 추적하려 하여 작천(鵲川)에 진을 쳤는데, 작천은 병영(兵營)ㆍ강진(康津)ㆍ영암이 서로 만나는 데입니다. 주장은 추격하려 하다가 왜적들이 이 틈을 타고 성으로 들어오게 될까 싶으므로 감히 추격하지 못했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김경석이 남정을 보내 온 까닭은 자기의 공을 드날리려 한 것이다. 영암에서 이긴 것이 김경석의 공으로 된 것이 아닌데도 남정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속임수가 심하다.
사신은 논한다. 남정이 비록 김경석의 공을 드날리려고 했었지만 두려워하여 움츠린 실상이 그가 하는 말에 나타나니 가리울 수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찰사는 어디 있는가?”
하니, 남정이 아뢰기를,
“나주(羅州)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구(倭寇)는 날로 번성하는데 싸움에 이겼다는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비록 이번에 참획한 것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국가의 수치는 조금도 씻지 못했으니, 순찰사와 방어사 및 병사에게 말하여 다시 더욱 더 잘 조치(措置)하여 기어코 모두 섬멸시키도록 하라.”
하니, 좌승지(左承旨) 이탁(李鐸)이 아뢰기를,
“신이 그 곳의 지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남정의 말을 들어보고 병가(兵家)의 일로 헤아려보면 왜적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참이 바로 기회를 탈 수 있는 순간이니 만일 우리 군사들이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군사들이 바야흐로 작천에 진을 치고 있다고 하니, 만일 왜적들이 내지(內地)로 들어 와서 배로 돌아갈 수 없게 한다면 모조리 잡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왜놈들이 여기에 있으면서 도망하여 흩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동쪽에서 충돌하고 서쪽에서 공격할 염려가 있으므로 기필코 섬멸한 다음에야 그만두어야 할 것이니, 이런 뜻을 순찰사에게 말하라.”
하니 이탁이 또 아뢰기를,
“왜놈들이 달량(達梁)을 함락한 뒤부터 우리 나라를 만만하게 여겨 사방으로 분산하여 들어 왔습니다. 영암에서 이긴 것을 바로 기회로 삼아야 할 때인데 다만 돌아가는 길을 끊어 버리지 못한다면 잡지 못하게 될 듯싶습니다.”
하였다.
당초에 왜선(倭船) 60여 척이 전라도 달량진(達梁鎭) 해구(海口)에 정박하자, 절도사(節度使) 원적(元績)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장흥 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영암 군수(靈巖郡守)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구원하러 들어갔는데, 왜적들이 거짓 피하여 도망하자 원적이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 지키며 방어하였다.
적들의 무리가 크게 몰려와 성을 포위한 지 3일이 되니 원적은 구원할 군사는 오지 않고 양식도 장차 다 떨어져 가므로 군사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 화친(和親)을 청하게 하였다. 이에 적들이 사세가 약함을 알아차리고서 더욱 급박하게 포위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원적의 머리를 베고 군사들도 남김없이 살해하였으며 한온도 또한 죽었다. 이덕견은 애걸하여 살아서 돌아왔는데 도적들이 그 편에 글을 부쳐 ‘바로 서울을 범하겠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하였다.
이때 수사(水使) 김빈(金贇)과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희손(李希孫)이 구원하러 들어갔다가 모두 패하여 도망하자 적들이 승세를 타고 마구 각처의 진(鎭)에 침입하였으며 드디어 병영(兵營)과 강진(康津)까지 위협하였으므로 지키는 장수들이 멀리서 바라만 보고도 도망하였다. 그러자 관아(官衙)에 불을 질러 화염이 뒤덮혔고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모조리 약탈해 갔다.
또 적들이 나뉘어 가서 장흥부를 침범했는데 성에 지키는 사람이 없어 즉각 함락되었다. 여염(閭閻)으로 들어가 집들을 불태우고 재물 약탈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하므로 사민(士民)들이 산골로 도망하여 숨었다. 이때 마을마다 들어온 적이 혹 겨우 3~4명이었는데도 감히 대항하는 사람이 없었고 연해(沿海)의 진(鎭)과 고을들이 한결같이 텅 비어버렸다.
도적들이 약탈한 재물을 소와 말에 나누어 싣고 조금도 기탄하는 것 없이 영암 향교(靈巖鄕校)로 들어가 위판(位版)과 제기(祭器)를 망가뜨리고, 때때로 촌락(村落)에 나와 노략질하며 오래 있을 계획을 했었는데, 방어사 김경석(金景錫)은 겁내고 두려워하여 감히 나가서 싸울 계책을 하지 못하고 단지 성으로 들어와 자신을 보존하고만 있었다.
당초에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영암에 진 치고 머무르면서 나가 싸우기를 청하여도 김경석이 오히려 듣지 않다가, 군교(軍校)들이 ‘만일 군사가 패하게 되면 혼자 죄를 받아야 한다.’고까지 말을 하며 재삼(再三) 강청하자, 김경석이 할 수 없이 나가 싸우라고 허락하기만 하고 자신은 오히려 성 안에 남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 나서지 않았다. 장사(將士)들이 이윤경의 지시를 받고 분개(憤慨)하고 원망하며 결전(決戰)하여 적의 머리 1백여 급을 베자 남은 적들이 군량과 재물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이날 나뉘어 나가 나주(羅州)의 촌락을 약탈한 적들이 향교에 와 보니 그의 무리들이 이미 흩어졌으므로 드디어 정신없이 도망갔다. 이에 이윤경이 또한 군사를 내어 끝까지 추격하기를 청하였으나 김경석이 듣지 않다가 강청해서야 들어주어, 겨우 몇급만 베게 되었다.
사신은 논한다. 국조(國朝) 이래로 태평한 지 수백 년이 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이번의 달량(達梁) 왜변(倭變)이 생겼으므로 각 고을을 지키는 장수들이 풍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지니, 적들의 기세가 날로 치열해지므로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하였다. 조정이 형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을 전라도 도순찰사(全羅道都巡察使)로 삼아 시위병(侍衛兵) 및 도성(都城)에서 뽑아낸 용맹스럽고 힘 있는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가게 했다. 그러나 나주에 진 치고 있으면서 왜적들의 무리가 나주 지경까지 마구 들어와도 오히려 또한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있고 나가지 않았다. 이준경은 평소에 당시의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조정이 그를 믿으며 중시하는 바이었는데 갑자기 소소한 도적을 만나자 조처가 이러하였으므로 사민(士民)들이 실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절도사(節度使)가 죽었음을 듣고 즉시 이희손(李希孫)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가도록 했는데 이희손이 적을 바라보곤 도망하여 피했는데도 김주가 죄 주지 않았고, 장흥(長興)에 있어서는 심지어 주장(主將)을 차정(差定)하여 지키게 하지도 않았다가 적의 기세가 왕성함을 듣고서는 즉각 영암(靈巖)으로 물러가 피하였다. 또 이희손으로 하여금 강진(康津)을 지키도록 했었는데 이때 방어사 김경석(金景錫)과 남치근(南致勤), 절도사 조안국(趙安國)이 모두 왔었으나 이희손이 구원을 청했는데도 오히려 머뭇거리고만 있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희손이 겁을 먹고서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해남(海南) 성 하나는 현감(縣監) 변협(邊協)을 힘입어 극력 수비(守備)하며 때때로 나가 분산(分散)하여 도적질하는 적들을 잡았으므로, 이로 인해 함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영암에서 이겼을 적에 만일 앞질러 나가서 싸워 바다 어구에 있는 왜선(倭船)들을 빼앗고서 추격했었다면 남김없이 모두 섬멸하였을 것인데, 주장이 나가서 싸울 뜻이 없어 적을 돌아가도록 놓아두었으며 심지어는 하룻밤을 지내고 모두 배를 타고 도망하게까지 하였다. 남치근은 또한 요격(邀擊)할 수 있었는데도 두려워하여 움츠리고 있으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마침내 수치를 씻지 못하게 하였었다. 모든 장수들의 무상(無狀)함이 한결같이 이와 같았다.
【원전】 20 집 278 면
【분류】 외교-왜(倭)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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