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역사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 - 태종 18년
서구문화원
날짜 2021-01-27 11:29
판광주목사 우희열이 제언의 일을 상서하다 - 태종 18년 무술(1418) 1월 13일(갑자)
판광주목사(判廣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그윽이 듣건대, 요(堯)임금과 탕(湯)임금의 세대에도 큰 물과 가뭄의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지 않았던 것은 재앙에 대비하여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정(鄭)나라에서 경수(涇水)를 파서 백성들이 그 이익을 얻었고, 문옹(文翁)이 물 내려가는 구멍을 파서 사람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였으니, 역대에 수리(水利)를 일으켜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 것이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 지금 모두 고증할 수 있습니다. 신이 어둡고 어리석은데도 성은(聖恩)을 잘못 입어 지위가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니 실로 분수에 넘칩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서 늙고 또 질병(疾病)에 걸려 비록 규곽(葵藿)의 정성이 있으나, 돌아보면 조그마한 도움도 없었습니다. 삼가 관견(管見)을 조목별로 뒤에 열거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상재(上裁)하여 시행하소서.
1. 신(臣)이 근래 전라도 김제군(金堤郡) 벽골제(碧骨堤)를 보니, 사방 둘레가 2식(息)이 넘는데 수문(水門)이 다섯이 있어 큰 내[大川]와 같아서 1만여 경(頃)을 관개(灌漑)할 수 있었습니다. 옛사람이 처음으로 제언(堤堰)을 쌓아서 수리(水利)를 일으켜, 그 공(功)이 심히 컸습니다. 갑오년(甲午年)에 수축(修築)한 이후 둑[堤] 아래 넓은 들에는 화곡(禾穀)이 무르익어 이를 바라보면 구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몇 군데는 통(筒)을 잇대어 견실(堅實)하지 못하여, 전지 70여 경(頃)이 아직도 다 개간(開墾)되지 못하고 있으니 진실로 한스럽습니다. 원컨대, 일찍이 축조(築造)에 경험이 있는 사람인 전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파견하여 그 고을 수령(守令)과 함께 통(筒)을 잇댄 곳과 수구(水口)가 무너진 곳을 단단하게 쌓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신이 고부(古阜)의 땅 눌제(訥堤)를 보니, 옛날에는 3대 수문(水門)을 설치하였는데, 그 동쪽 수문(水門)은 부령현(扶寧縣) 동쪽 방면으로 1식(息)여 리 흘러 들어가고, 가운데 수문은 부령현 서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고, 서쪽 수문은 보안현(保安縣) 남쪽 방면으로 흘러 들어가서, 관개(灌漑)의 이익이 1만여 경(頃)이었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익은 많고 손해는 적은 것을 가히 알 수 있고, 또 도랑[溝洫]의 옛 터 를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습니다. 혹자(或者)가 이에 말하기를, ‘둑 안에 있는 전지는 수침(水浸)하여 사용하지 못하고 또 둑 언덕은 낮은데 전야(田野)는 높아서 비록 개간(開墾)하고자 하더라도 장차 쓸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나, 그러나 비 온 뒤에 수침(水浸)의 해는 며칠에 지나지 않았고 즉시 아래로 흘러내려 가서 곡식에 손해된 것은 없었습니다. 이제 부안 병마사(扶安兵馬使) 한계흥(韓繼興)과 그 현(縣)에 사는 전 호군(護軍) 김당(金堂)과 이민(吏民) 등이 개축(改築)하기를 매우 바라니, 전 현감(縣監) 곽휴(郭休)를 보내어 고쳐 수축하여 권농(勸農)하도록 명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1. 벽골제(碧骨堤) 아래 진지(陳地)가 거의 6천여 결(結)이고, 눌제(訥堤) 아래 진지(陳地)가 1만여 결(結)인데, 다만 그곳의 거민(居民)을 가지고서는 능히 다 경작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는 인구가 조밀하고 땅이 협착하여 그 경작할 땅이 없으니, 혁거(革去)한 사사 노자(寺社奴子) 7,8백 명을 뽑아서 옮겨 살게 하고, 각 고을의 묵은 곡식과 소[牛隻] 2백여 마리를 무역하여 주어서 국농소(國農所)를 더 설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1. 눈이 녹은 물[雪水]은 오곡(五穀)의 정기(精氣)이니, 매년 9월에 얼음이 얼기 전에 보(洑)나 제언(堤堰)을 더 쌓아서 얼음이나 눈의 물을 저장하였다가, 다음해 이른 봄에 흡족하게 관개(灌漑)하소서. 민생(民生)을 후(厚)하게 하는 양책(良策)은 칠사(七事)의 조획(條畫)인데, 그 안에, 다만 ‘권과농상(勸課農桑)’ 이라고만 일컫기 때문에 수령(守令)들이 농사(農事)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가을ㆍ겨울철이 바뀌는 때에 마음을 써서 축조(築造)를 더하지 않다가 혹은 죄(罪)를 얻는 자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수령(守令)이 체대(遞代)할 때 해유 문자(解由文字) 안에 ‘어느 수령은 어느 해 어느 철에 옛 터에 축조를 더 한 것이 몇 군데이고, 새로운 터에 축조한 것이 몇 군데이고, 물을 저장한 것이 몇 척(尺)이고, 관개(灌漑)한 땅이 몇 결(結)이라.’는 것을 일일이 갖추어 써서 시행하여 감사(監司)게게 보고하고, 감사가 척간(擲奸)하여서 출척(黜陟)에 빙고하게 하소서.”
임금이 읽어 보고 박습(朴習)에게 물었다.
“벽골제(碧骨堤)는 경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쌓은 것인데, 그 이익이 얼마쯤 되던가?”
박습이 대답하기를,
“둑 위에 있는 땅은 침몰된 것이 비록 많지만, 둑 아래에서는 이익이 거의 3배나 되었습니다. 근처의 백성들이 모두 금을 그어서 푯말을 세웠으나 아직도 다 개간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탄복하고,
“이처럼 넓은 땅을 여러 해 동안 개간하지 않다가, 지금에야 개간할 수 있었던 것도 백성들의 운(運)이었다.”
하였다.
박습이,
“신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을 차견(差遣)하여 그 역사를 감독시킨다면,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쓸 만한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묻기를,
“나이가 얼마인가?”
하였다.
박습이 대답하기를,
“중년의 사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어느 고을 사람인가?”
하매, 박습이 대답하기를,
“광주(光州) 사람입니다. 김제 군수(金堤郡守)가 되었을 때 관찰사 권진(權軫)이 작은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파직(罷職)시켰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출신(出身)이 어떠한지를 물으니, 좌대언(左代言) 이명덕(李明德)이 대답하기를,
“일찍이 생원(生員)ㆍ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내가 듣건대, 윤전(尹琠)의 아들 윤흥의(尹興義)도 가히 쓸 만한 사람이라 한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뒤에 서용(敍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이어서 이명덕 등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이은(李殷)은 노인(老人)이지만 공사(公事)를 꺼리지 않으니, 경상도에 이문(移文)하여 노인으로 하여금 올라오지 말게 하고, 도내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또 경기에 이문(移文)하여 우희열(禹希烈)로 하여금 경기의 제언(堤堰)을 순찰(巡察)하게 하라.”
하고, 또 명하였다.
“각도의 수령(守令)이 양반(兩班)과 인리(人吏)의 말을 듣고 제언(堤堰)을 파괴하여 고기를 잡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기강이 없고 잔열(殘劣)한 사람들이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진실로 이러한 수령이 있으면 조율(照律)하여 논죄하라.”
【원전】 2 집 200 면
【분류】 농업-수리(水利) / 농업-개간(開墾)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주-D001] 탕(湯) :
- 은(殷)나라의 시조.
- [주-D002] 정(鄭) :
- 중국 춘추(春秋)시대의 나라의 하나.
- [주-D003] 경수(涇水) :
-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부(西安府) 경양현(涇陽縣) 남쪽 7리에 있는 강.
- [주-D004] 문옹(文翁) :
- 중국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 촉(蜀)의 군수(郡守).
- [주-D005] 규곽(葵藿) :
- 해바라기처럼 임금을 바라보는 것.
- [주-D006] 통(筒) :
- 물을 잇대는 수로.
- [주-D007] 국농소(國農所) :
- 나라에서 경영하던 농장(農場). 노예(奴隷)를 집단으로 사역(使役)시키고 곡식 종자(種子)와 소[牛]를 지급하여 경작시켰음.
- [주-D008] 칠사(七事) :
- 수령이 지켜야 할 일곱 가지 조목. 즉 농상성(農桑盛)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사송간(詞訟簡)ㆍ간활식(姦猾息).
- [주-D009] 권과농상(勸課農桑) :
- 농업과 잠상(蠶桑)을 권하여 일으킴.
- [주-D010] 해유 문자(解由文字) :
- 관원들이 전직(轉職)할 때 재직중(在職中)의 회계ㆍ물품 출납에 대한 책임을 해제 받던 증명서. 인수 인계가 끝나고 호조나 병조에 보고하여, 이상이 없으면 이조에 통지하여 해유 문자를 발급하였음.
- [주-D011] 척간(擲奸) :
- 부정이 있나 없나를 캐어 살핌.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 제목 | 발행처 |
---|---|---|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 광주 향토사 연구 |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 동구의 인물2 | 광주광역시 동구청 |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남구문화원(2001) |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남구문화원(2001) |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남구문화원(2014) | 광주 남구 마을(동)지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남구문화원(2014) | 광주 남구 민속지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남구문화원(2021) | 양림 인물 | 광주남구문화원 |
광주동구문화원(2014) |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 광주동구문화원 |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 누리집(2023.2 |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 광주의 다리 | 광주문화원연합회 |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 광주문화원연합회 |
광주문화재단(2021) | 근현대 광주 사람들 | 광주문화재단 |
광주북구문화원(2004) | 북구의 문화유산 | 광주북구문화원 |
광주서구문화원(2014) | 서구 마을이야기 | 광주서구문화원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옛 지도로 본 광주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 국역 光州邑誌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 영산강의 나루터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 경양방죽과 태봉산 | 광주시립민속박물관 |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 1896광주여행기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 광주천 | 광주역사민속박물관 |
김경수(2005) | 광주의 땅 이야기 | 향지사 |
김대현.정인서(2018) |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 광주문화원연합회 |
김정호(2014) | 광주산책(상,하) | 광주문화재단 |
김정호(2017) |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 광주문화원연합회 |
김학휘(2013) |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 광산문화원 |
김학휘(2014) |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 광산문화원 |
김학휘(2015) |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 광산문화원 |
김학휘(2016) |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 광산문화원 |
김학휘(2018) |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 광산문화원 |
김학휘(2019) |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 광산문화원 |
남성숙(2017) | 전라도 천년의 얼굴 | 광주매일신문 |
노성태(2016) | 광주의 기억을 걷다 | 도서출판 살림터 |
노성테.신봉수(2014) |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 광주문화원연합회 |
박규상(2009) | 광주연극사 | 문학들 |
박선홍(2015) | 광주 1백년 | 광주문화재단 |
정인서(2016) |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 광주문화원연합회 |
정인서 외(2015) | 광주의 옛길과 새길 | 시민의 소리 |
정인서(2011) |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 대동문화재단 |
정인서(2011) | 광주문화재이야기 | 대동문화재단 |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
천득염(2006) | 광주건축100년 | 전남대학교출판부 |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 광주향약 1,2,3. | 한국학호남진흥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