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옛날 중종 때 호남에 죽곡(竹谷) 이 선생 형제가 있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으로 일세 유림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나, 매양 낭서(郞署)와 주군(州郡)을 전전하다가 끝내 그 뜻과 공업을 밝은 시대에 펼치지 못하고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나 길이 당세에 애석해 하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황준량(黃俊良, 1517~1563)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
허균(許筠)과도 교유했고, 문장과 서화에 모두 재능이 있었으며, 삼사(三司)에 있을 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목사(使), 예조와 형조의 참판, 승문원 제조, 경상 감사 등을 역임하였다. 창계의 외조부 조석형(趙錫馨)의 부친이다. 1660년(현종1) 진사시에 입격한 뒤 동복 현감(同福縣監), 태인 현감, 호조 정랑,
황명 조선국 고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보양관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행장- 정구(鄭逑, 1543~1621)《여헌집(旅軒集)》 권13장현광(張顯光, 1554~1637).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 시호는 문강(文康).선생은 성(姓)이 정씨(鄭氏)이고 휘(
형조 판서 증 영의정 시호 충정공(忠貞公) 오공(吳公)의 신도비명 병서금상 15년 기사년(1689)에 중궁이 손위(遜位)하자 판서 양곡(陽谷)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참판 이공 세화(李公世華), 응교 박공 태보(朴公泰輔) 등 80여 인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극간(極諫)을 하였는데, 오공이 실로 소두(疏頭)였다. 이에
병신년 만력 24년, 선조 29년(1596년)당학(唐瘧)이 전국에 전염되어 사람마다 앓지 않는 이가 없었다.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군사가 일어났다. 이몽학은 본시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褊裨)가 되어 종군하였다가 국사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알고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士類)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이 세상에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무오(1798) 11월 30일(기축)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홍청ㆍ전남 두 도의 암행 어사 심택이 탐관 오리들을 보고하다 - 인조 26년 무자(1648) 2월 17일(임오) 홍청(洪淸)ㆍ전남(全南) 두 도의 암행 어사 심택(沈澤)이 아뢰기를,“청주 목사(淸州牧使) 이만영(李晩榮)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쇠고기를 쓰고 있으며, 덕산 현감(德山
의금부에 전지하여 탁윤신 등을 놓아 보내게 하다 - 성종 3년 임진(1472) 5월 24일(경신) 의금부에 전지하여, 부여(扶餘)에 영속(永屬)한 난신(亂臣) 이명민(李命敏)의 아우 이미민(李靡敏), 영동(永同)에 안치(安置)한 난신 박계남(朴季男)의 형 박맹우(朴孟愚), 광주(光州)에 안치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을 합향(合享)하는 것을 점이(粘移)하는 건- 현종(顯宗) 12년(1671) : 서원등록(書院謄錄)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이전에 접수한 본도(本道)의 관문(關文)에 점련(粘連)한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첩문(牒文)에, “본주(本州)에는 예로부터 눌재(訥齋)와 사암(思庵) 두 선생
퇴계에게 올린 편지〔上退溪書〕 금계집 내집 제4권 / 잡저(雜著) : 이이한 번 주남(周南)에 누워 지금까지 체류하고 있으며 증세가 더욱 심해져 아직 떠날 날짜를 잡지 못하니 마음이 울울합니다. 사직한 후 공무를 일체 끊고 시골집에서 임시로 거처하고 있으며, 스무날 사이에 출발하려고 하나 몸이 이미 극도로 허약해져
기우용문현 에게 답함 신축년(1841, 헌종7) 2월〔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 서(書)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사양함을 예(禮)로 여기는데, 사양함은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연향(宴享)할 때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 전라도(全羅道) 광산현(光山縣) 동쪽으로 창평현(昌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쪽으로 화순현(和順縣) 경계까지 21리, 남평현(南平縣)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나주(羅州) 경계까지 47리, 북쪽으로 진원현(珍原縣) 경계까지 21리이며, 서울까지의 거리는 7백 2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